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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

입력 | 2009-03-18 13:45:00


"나, 나옵니다!"

앨리스가 외쳤다. 스티머스 모니터에선 계속 영상이 재구성되고 있었다. 조금씩 만들어지는 영상에는 색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색맹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개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노이즈가 심해 데이터가 엉망일 뿐만 아니라 눈높이가 낮다보니 영상의 상당부분이 방바닥이다. 초점 없이 심하게 흔들릴 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강한 요동이 일었다. 개의 시선이 주기적으로 흐트러지면서 몸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범인이 개를 때리고 있는 것 같습……."

"가만!"

석범이 앨리스의 말을 잘랐다. 화면이 휙 올라가면서 희미하게 개들이 보였다. 안방 천장에 붙은 개들의 사진이다. 그리고 안방 바닥에 초콜릿이 흩뿌려졌다. 퍼그는 바쁘게 돌아다니며 초콜릿을 먹어치웠다. 둥근 초콜릿을 먹은 후엔 삼각뿔 초콜릿을 삼켰고 그 다음엔 별모양 초콜릿과 정사각형 초콜릿에도 침부터 발랐다. 그 달콤한 과자에 약이라도 섞은 것일까. 초콜릿을 먹을수록 퍼그의 발놀림이 점점 흐느적거렸다. 쿵쿵, 코를 바닥에 박았다가 일어서고 또 박으며 초콜릿을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퍼그의 머리가 매니큐어를 칠한 엄지발가락에 부딪혔다. 발가락이 꿈틀거렸다. 앨리스가 외쳤다.

"검사님! 저, 저건 도그맘의 발가락입니다."

석범이 짧게 이었다.

"그렇군. 도그맘을 죽이기 전에 퍼그부터 두들겨 팼어."

"자, 자, 힘 내. 고개를 들어. 자, 자, 초콜릿을 던져준 놈을 보라고. 자, 자!"

주문을 외듯, 앨리스가 '자, 자' 를 연발했지만, 퍼그는 두더지처럼 바닥만 훑었다.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민선이 노력한 보람도 없이, 갖가지 초콜릿들만 구경하고 그만일까.

너무 심하게 비틀거려 화면을 보는 사람까지 어지러울 즈음, 퍼그의 시선이 다시 올라왔다.

"자, 자! 얼굴, 얼굴!"

앨리스가 손뼉을 치며 화면 앞으로 다가앉았다.

흐릿하던 화면이 점점 또렷해졌다. 퍼그의 시선이 머문 곳엔 각시탈이 긴 혀를 쏙 내밀었다. 두툼한 털장갑을 낀 각시탈의 손에는 쇠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각시탈은 쇠방망이를 천천히 들어 올렸고, 퍼그의 시선도 각시탈의 코에서부터 쇠방망이를 따라 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화면이 중단되었다.

"망할 퍼그…… 주인이 죽어가는데 바닥에 떨어진 초콜릿만 밝히다니."

앨리스가 자기 분을 참지 못하고 애꿎은 퍼그만 잔뜩 욕하다가 씩씩 대며 방을 나갔다. 민선은 화면을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석범이 말했다.

"수고하셨는데…… 아무래도 범인을 추적할 단서를 찾기는 어렵겠습니다."

화면이 꺼졌다. 그런데도 민선은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노박사님!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따로 자문료는 지급될 겁니다. 뭘 좋아하세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석범이 말을 멈췄다. 굵은 눈물 두 자락이 민선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혼잣말처럼 아랫입술을 살짝살짝 깨물며 중얼거렸다.

"악귀의 분노가 순간적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 본연의 영혼은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술에 찌든 사악한 증오심이 온몸을 전율케 했다. 나는 조끼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어 그 불쌍한 놈의 목덜미를 잡고 아무렇지도 않게 한쪽 눈을 도려내버렸다!"

에드가 앨런 포의 에서 고양이 플루토의 눈을 도려내는 대목이다. 중학교 시절, 석범은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보고 한 동안 아침마다 두 눈을 비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민선은 퍼그의 고통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듯 반복해서 묻고 또 물었다. 석범은 등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민선이 그의 손등에 뺨을 댔다. 그 눈물의 차가움이 석범의 손등을 타고 팔꿈치를 지나 어깨와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민선 씨!"

석범이 이렇게 겨우 이름을 부른 후 그녀가 슬픔을 다독일 때까지 꼼짝할 수 없었다. 퍼그의 고통을 함께 기억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