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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에서]부조리극에 연쇄살인마 강호순 캐릭터…

입력 | 2009-03-19 02:53:00


부조리극에 연쇄살인마 강호순 캐릭터

말기적 징후 시달리는 오늘의 사회 그려

부조리극의 고전인 연극 ‘수업’에 연쇄살인마 강호순 캐릭터가 등장했다.

에우제네 이오네스코 탄생 100주년 기념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서울 종로구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수업’(연출 이윤택).

이오네스코가 1951년 발표한 ‘수업’은 본래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개인 교습을 하는 교수(이승헌)와 여제자(강영애) 사이의 언어유희를 통해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그린 작품이다.

교수는 덧셈은 잘하는데 뺄셈을 못하는 제자에게 뺄셈의 원리를 온갖 노력을 다해 설명하지만 제자는 직관적 반박으로 이를 계속 무력화시킨다. 귀가 두 개 있는데 그중 하나를 잘라내면 몇 개가 남느냐는 질문에 “내 귀는 원래부터 두 개”라고 답하는 식이다. 교양미 넘치던 교수는 고집불통 제자에게 점차 화를 내다가 언어학 강의에서는 온갖 궤변으로 제자의 혼을 빼놓는다. 이에 질린 제자가 치통을 호소하며 강의 중단을 호소하지만 교수는 이를 묵살하고 점차 광기를 드러내다가 급기야 제자를 겁탈하고 살해한다.

관객은 이 지독한 말장난과 심리전에 웃음보를 터뜨리다 그것이 살인으로 비화하는 장면에서 얼어붙는다. 연출가는 이 시점에서 6년 전 연출했던 이 부조리극을 잔혹극으로 몰고 간다. 겁탈 장면에선 배우들의 속살이 드러나고 살해 장면에선 피가 철철 넘친다.

연출자의 의도는 종반부에 가정부(하지은)가 그 살인이 40번째임을 알려주면서 불안에 떠는 교수에게 “이러면 좀 안심이 될 것”이라며 마스크와 야구 모자를 씌어주는 대목에서 명확해진다. 나치 완장을 채워주던 원작의 장면을 한국에서 익숙한 연쇄 살인마의 이미지로 치환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수업’은 50여 년 묵은 프랑스산 고급 와인이 아니라 쓰디쓴 한국의 소주로 탈바꿈한다. 세상이 부조리하고 진정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는 부조리극의 요설이 저 바다 건너 지식인들의 관념놀이가 아니라 바로 이곳의 현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윤택 씨는 “교수는 병든 인문학을, 여제자는 한없이 가벼운 요즘 젊은이를 상징한다”면서 “강호순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말기적 징후에 시달리는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