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아동문학의 터전
‘어린이’. 언제 들어도 싱그러운 말이다.
어린이라는 말은 소파 방정환(1899∼1931)이 1923년 처음 만들었다. 그 때까지는 동몽(童蒙), 아동, 소년 등으로 불렀다.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말에 ‘늙은이, 젊은이와 동등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았다. 기존의 윤리에 얽매여 어른들에게 종속되었던 어린이들을 어린이다운 감성으로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어린이라는 말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방정환이 1923년 3월 20일 국내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면서부터다.
개벽사에서 발간한 월간 ‘어린이’는 한국 근대 아동문학의 터전이 됐다. 아동문학의 1세대인 마해송 윤극영 이원수 등의 발표 무대였다. 동요 ‘고향의 봄’, 동시 ‘까치 까치 설날’, 동화 ‘호랑이 곶감’ 등이 모두 ‘어린이’를 통해 세상에 선을 보였다. 이와 함께 신인 아동문학가의 등용문이 되기도 했다.
아동문학에 대한 인식조차 미미하던 시절, 방정환은 잡지 ‘어린이’를 통해 아동문학을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그 가치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동시에 어린이들의 정서 함양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어린이’는 방정환이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인 1934년 7월 폐간됐다. 방정환의 요절로 ‘어린이’까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어린이’는 광복 이후 1948년 5월 속간되었지만 1949년 12월 통권 137호로 막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방정환의 서른두 해는 시종 어린이와 함께한 삶이었다. 일본 도쿄의 도요(東洋)대 유학 시절에 이미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고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했다.
1923년 5월 1일엔 아동문학가 윤극영, 마해송과 함께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색동회’를 창립하고 동시에 이날을 ‘어린이날’로 정해 기념식을 열었다. 이날 서울엔 어린이들의 행렬로 넘쳐났고 방정환은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이름의 전단 12만 장을 뿌렸다.
방정환은 여기에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라고 적었다. 어린이에게는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라고 당부했다.
1931년 7월, 방정환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세상을 떠나던 날 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야겠어. 문간에 검은 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어. 어린이들을 두고 가니 잘 부탁해.”
방정환의 마지막 가는 길은 그가 만든 ‘어린이’라는 말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