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휴대전화 없이 살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입사 2년차인 한 여성 직장인과 함께 실험에 나섰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는 지금은 생활필수품이 됐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없어도 큰 불편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10년 사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인터넷, 휴대전화 없이 3일 살아보기'에 도전할 직장인을 구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0여명에게 제안을 했지만 모두들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일부는 "인터넷, 휴대전화를 없앴을 때 생길 금전적 손해를 보상해 준다면 참여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 어렵게 섭외된 패션 쇼핑몰 '아이스타일24' 상품1팀의 김지혜 대리(28)가 최근 3일간 휴대전화를 (기자에게) 압수당한 채, 사무실과 집의 인터넷 접속을 끊은 상태에서 생활해 봤다.
●첫날부터 지각
첫날 오전 7시 반. 김 대리는 눈을 떴다.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늘 휴대전화로 알람을 맞춰 놓고 잠이 들었는데 휴대전화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만 푹 잔 것.
출근 시간은 8시 반.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여의도 회사까지 김 대리는 눈곱을 그대로 달고 서둘러 뛰었다.
회사까지 가는 길 내내 그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회사 동료에게 "조금 늦는다"고 미리 알리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뛰다 시피 하던 걸음을 멈추고 공중전화를 찾느냐, 아니면 전화 걸 시간에 뛰느냐, 선택해야 했다.
그는 결국 '전화할 시간에 뛰자'고 결정, 20여분 늦게 회사에 도착했다. 이미 회의는 시작됐고 지각한 그를 보는 팀장과 팀원들의 시선이 싸늘했다. "휴대전화가 없어서 말을 못했다"고 말한 들, 믿어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김씨는 "알람 같은 사소한 기능까지 휴대전화에 의존하는 줄 미처 몰랐다"며 "공중전화도 쉽게 찾을 수 없어 마치 사막에 버려진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자리 뜨면 '죽음'.
약속에 따라 인터넷을 이용할 수 없게 된 김 대리는 이날 종일 전화와 씨름해야 했다.
평소 인스턴트 메신저로 동시에 4, 5명과 의사소통을 하며 일을 진행하던 김 대리는 모든 업무를 전화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화벨이 쉬지 않고 울려댔다.
모든 대화는 "왜 로그인을 안 하느냐"로 시작됐다. 사정을 설명하고 업무관련 얘기를 3, 4분간 나눈 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또 울리는 전화벨.
메신저를 이용할 때는 문서나 통계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의사소통을 했는데 전화로는 이마저 불가능했다. 전화를 거는 시간만큼 일도 늦어졌다.
김 대리는 "평소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연락을 하면서 동시에 일도 하는 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며 "이런 식으로 일하면 밤을 새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인터넷 안돼? 그렇다면 파주로…
커뮤니케이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스타일24의 모든 업무는 인터넷기반으로 이뤄진다. 인터넷을 안 쓰고 회사 일을 하겠다는 것은 곧 업무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둘째 날. 김 대리는 재고를 파악한 뒤 필요한 제품을 추가로 주문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평상시라면 상품 재고는 바코드 인식을 통해 인터넷으로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 모델별 재고 수량이 입고되는 즉시 화면에 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김 대리는 1시간 넘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경기 파주시 물류창고로 가야 했다. 펜과 수첩을 이용해 일일이 재고를 파악한 뒤 4시간여 만에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무실에 돌아온 김 대리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와 책상에 접착식 메모지가 가득 붙어있었던 것. 각각의 메모지에는 전화 온 시간과 전화번호, 전화건 업체나 담당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전화를 대신 받아 준 동료들은 "너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이런 거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퇴근 시간. 김 대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사는 짓을 하루 더 해야 하나' 한숨을 쉬며 무심코 핸드백 안에 손을 넣었다가 '아차' 싶었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습관적으로 휴대전화의 DMB를 시청해 왔는데…. 그는 하는 수 없이 멍하니 차창 밖 풍경을 보며 내릴 때를 기다렸다.
'지금 몇 시쯤 됐을까', 또 무심코 손이 휴대전화를 찾았다.
김 대리는 "시간을 확인할 때조차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봐왔다는 사실도 이날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러다가 자칫하면 '왕따'?
셋째 날. 김 대리는 입사 동기들과 모처럼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그런데….
"야, 연예인 OO가 XX랑 결혼한다면서?"
"그 XX라는 연예인 예전에 누구랑 스캔들 있었다고 하던데?"
"그나저나 △△사건 범행의 끝은 어디냐? 방금 전에 새로운 범행이 또 밝혀졌다고 떴더라."
"아무래도 지난번 ▽▽사건도 그 사람 짓인 거 같아…."
김 대리는 그저 눈만 껌뻑거리고 듣는 수밖에 없었다. 대화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동기들이 나눈 대화는 어제 밤 9시 TV뉴스에 나온 것도, 오늘 아침 신문에 난 기사도 아니었다. 밥 먹으러 나오기 불과 몇 분전 인터넷에 뜬 이야기가 그날 점심 식사 때 화제가 됐던 것.
김 대리는 "인터넷을 쓸 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정말 세상이 분 단위로 바뀐다는 걸 그때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더 이상은 안돼!
그날 오후 거래처에서 김 대리에게 "업무 관련 서류를 이메일로 보내 달라"는 전화가 왔다.
서류 분량은 약 200여 쪽. 반드시 컬러로 봐야 하는 도표까지 있어 팩스로 넣기는 불가능 했다. 결국 김 대리는 사정을 설명하고 일일이 인쇄해 '퀵서비스'를 불렀다.
"내일이면 이메일을 이용할 수 있으니 하루만 기다려 달라"라고 양해를 구하기에는 너무 급한 자료였다.
우여곡절 끝에 3일이 지났다. 마지막 날 저녁은 친구들과 만나 가볍게 호프 한잔 하면서 그동안 겪은 얘기를 풀어 놓을 시간.
'휴대전화도 없는데, 늦으면 안 되지.'
10분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해 30분 넘게 기다렸으나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 대리는 공중전화를 찾았다. 동전을 넣고 왼손으로 수화기를 든 다음 오른손 검지로 버튼 하나를 길게 눌렀다. 그는 "나도 모르게 휴대전화인 줄 알고 친구 번호가 저장된 단축번호를 눌렀다"고 한숨을 쉬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친구에게 전화를 건 김 대리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야, 너 왜 안 오니? 아까 내가 약속 장소 바뀌었다고 전부 문자 보냈잖아!"
나성엽기자 cpu@donga.com
▲동아닷컴 임광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