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일본에서 북한에 납치된 여성의 가족과 만난 이야기가 기사화되었을 때 어느 선배에게서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꽤 오래전부터 집안일을 잘 돌보아주는 파출부 아주머니가 이런 소리를 하니 어찌 대응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KAL기 폭파는 광주 학살 사건에서 국민의 관심을 돌려보려던 전두환이가 시킨 일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또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이지요. 이명박이는 아랫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도 너무 몰라요.”
불행히도 정부에 대한 불신은 어찌 보면 우리 사회의 고질이 되었고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다는 사실은 이미 뉴스거리도 못 된다. 하지만 절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어 당선된 대통령에 대한 불신의 강도가 그 아주머니처럼 모든 객관적 증거도 무시할 정도로 높은 국민이 있다는 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만이 문제라면 다음 선거에서 갈아 치우면 된다. 그러나 국민 간 이성적 대화의 가능성이 없어진다면 그것은 훨씬 더 심각하고 치유가 쉽지 않은 망국적 병이 될 수 있다. 국회 내에서 여야 간 관계가 정책 대결의 선을 넘어서서 이판사판식의 몸싸움으로 치닫곤 하는 모습도 결국은 이성적 사고와 대화의 능력 결여라는 사회 전반의 병폐와 무관치 않다.
KAL기 폭발을 음모로 보는 시각
외세의 압박에서 벗어나서 민주주의 실험을 시작한 지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아니 어쩌면 지금 전보다도 더, 왜 우리는 이처럼 서로 간에 이성적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 분열을 겪을까? 다른 사회보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원인 때문인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경제로만 본다면 우리보다 더 심각한 불평등을 안고 있는 나라가 많지만 우리와 같이 심한 소통의 막힘을 겪지는 않는다.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까지 치렀던 우리의 기구한 역사에서 좀 더 깊은 해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도 이제는 반세기가 지난 먼 옛날의 이야기이며 우리 국민은 어차피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이익공동체로서 전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경쟁하며 살고 있음을 남도 우리도 다 안다. 결국 불신과 반목의 원인은 현실 자체에 있기보다는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이나 태도와 관련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성적 대화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나라,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의 경우는 거의 예외 없이 어릴 적부터 합리적 사고와 대화의 훈련을 시킨다. 예를 들어 문장을 여러 개 늘어놓고 그것들을 ‘사실’과 ‘의견’, 그리고 두 가지가 섞인 내용, 세 가지로 구분하라는 과제가 국어 교육의 일부가 되고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제도인가를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게 하는 훈련도 시킨다. 감정에 치우치거나 검증되지 않은 가정이나 편견에 근거한 주장은 설득력을 갖지 못함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세가 일찍부터 몸에 배게 되므로 성인이 되어 복잡한 사안에 부닥치더라도 시비를 정확히 가리며 서로 설득하고 승복하는 법을 터득한다.
우리의 경우 교육의 어느 단계에서도 그런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고 인문 교양 교육은 계속 약화되므로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솔깃한 것이면 덮어놓고 진실로 믿어버리며 군중심리에 매몰되는 경향이 강하다. 정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전지전능한 기구로서 잘못된 일은 모두 위정자가 악하기 때문이라는 가정, 또는 정반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은 모두 못났거나 인간적인 감정도 약하다는 듯한 가정을 쉽게 진실로 받아들인다. 종교적 맹신과 무신론의 양 극단을 오락가락하면서도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는 인위적 결단이나 능력 외에 운명의 작용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줄 모른다.
설득하고 승복하는 법 교육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며 대화를 하는 훈련이 하루아침에 이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구급책은 찾을 수 있다. 우선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의 독자는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을 반드시 곁들여 읽고 인터넷과 방송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주요 신문도 읽어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서로 다른 입장에 선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이 그것이다. 맹목적 불신과 반목처럼 개인과 공동체를 함께 파괴시키는 큰 힘은 없다.
이인호 KAIST 김보정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