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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연차 로비’ 수사 굵고 짧게

입력 | 2009-03-24 21:00:00


'굵고 짧게.'

질풍노도처럼 진행되는 검찰의 '박연차 로비' 수사를 보고 문득 떠오른 두 단어다. 기자는 21년 전 5공비리 수사를 비롯해 수서비리, 한보사건, 전노비자금 사건 등 크고 작은 사정수사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이인규 대검 중앙수사부장을 포함해 18명의 검사로 구성된 수사진은 성역 없는 수사를 다짐하고 있다. 전 정권 실세뿐만 아니라 현 정권 실세도 걸리면 치겠다는 뜻이다.

벌써부터 이명박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기업인의 이름도 거명되고 있고, 현 정권 초대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이종찬 전 서울고검장의 동생이 박연차 태광실업회장과 7억원을 빌린 사실도 확인됐다. '대운하 전도사'를 자처했던 추부길 전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은 이미 쇠고랑을 찼다.

검찰은 정권이 바뀌면 으레 캐비닛 속에 묻어둔 자료의 먼지를 털고 전 정권 때의 먼지 털기 수사에 나선다. 이를 두고 야당은 예외 없이 '표적 사정'이니 '편파 수사', '공안 탄압'이라고 반발한다. 통과의례라고 넘기기엔 너무 후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절로 쓴웃음을 짓게 된다. 검찰을 편들 생각도, 떼쓰는 야당을 편들 생각도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이후 통치권자의 비자금 운용은 잘못된 관행이라는 생각을 밀어붙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밑에서 거둬 바치고,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직접 거둬 쓰고, YS는 받지도 쓰지도 않는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YS의 측근들은 생각이 달랐다. 홍인길 전 대통령총무수석비서관은 "개혁에도 군자금이 필요하다"며 검은 돈을 만들어 여야를 불문하고 뿌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임 중 기업의 돈을 받지 않았다. DJ는 취임 후 전국검사장들과의 오찬자리에서 "취임 후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신 중 좌장인 권노갑 전 의원은 검은 돈을 만졌다. 한보사건으로 홍인길 권노갑 두 사람은 나란히 철창신세를 졌다. YS와 DJ의 신임을 바탕으로 상도동과 동교동계의 자금관리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 박 회장의 돈을 받았는지는 이번 수사가 끝나봐야 알 것 같다. 정계의 친노 인사들은 검찰이 이광재 의원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박정규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까지 체포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경남 김해가 연고지인 박 회장이 이 지역 정·관·법조계 인사들에게 금품로비를 했기 때문에 'PK초토화→정계개편' 설까지 나돈다.

지금까지 검찰은 정교하게, 나름대로 형평을 고려하며 수사하는 것 같다. 수사에서의 절제와 품격을 강조해 온 임채진 검찰총장은 지금 외유중이다. 수장이 자리를 비운 중에 예민한 수사를 해낼 만큼 검찰은 과거에 비해 역량이 성숙한 것인가.

오랜 기간 검찰을 드나들면서 느낀 소회와 체험으로 충고하고 싶다. 수사를 하다보면 비리정보가 꼬리 물 듯 수집되는 경우가 흔하다. 애초 겨냥했던 목표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사람이 유탄을 맞기도 한다. 수사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검성(劍聖)으로 불린 전설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1584~1645)는 오륜서(五輪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물을 보는 눈은 관(觀·마음의 눈)과 견(見·육체의 눈)의 두 가지가 있다. 싸울 때는 관의 눈을 크게, 견의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가까운 곳의 움직임을 통해 대국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69번의 진검승부를 하면서 한번도 진 적이 없는 불세출의 검객이기 이전에 그는 서화와 불상조각에 능하고 노장(老莊)사상에 심취한 도인이기도 했다. 싸움에서 이기기위해선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에 현혹돼선 안 되며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주시해야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는 게 그가 갈파한 핵심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미증유의 경제대란에 휩싸여 있다. 그래서 이번 수사는 시(始)와 종(終)이 분명하고 절도가 있어야 한다. 지나치면 항상 역풍이 분다.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