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청소년대표팀 신의손 골키퍼 코치(왼쪽)가 경기 파주시 축구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선수에게 볼을 던져주며 훈련을 시키고 있다. 파주=연합뉴스
‘축구선수 귀화1호’ 신의손 청소년 대표팀 골키퍼 코치
슛보다 막기 힘들었던건 그라운드 밖 생활
그래도 날 끌어준 건 한국인들의 사랑과 배려
1992년 한국으로… K리그 0점대 실점률로 ‘神의 손’ 명성
“대표팀 코치 생각지 않은 초대 받고 요즘 신바람 납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뽑아줘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달 초 귀화 외국인 출신으로 사상 처음 한국청소년(20세 이하)대표팀에 승선한 신의손 골키퍼 코치(본명 발레리 샤리체프·49)는 “생각지 않은 초대”라며 놀라워했다.
신 코치는 스포츠계에서 코리안 드림을 이룬 대표적인 외국인으로 꼽힌다. 선수 때부터 지도자 시절까지 꾸준하게 성과를 내며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해온 모범 사례다. 그는 구리 신씨의 시조로 한국 사회에 동화하려고 노력했고 성공적으로 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 명과 암이 엇갈린 선수생활
실력만 있으면 영웅대접까지 받을 수 있는 게 스포츠 세계. 신 코치는 실력은 최고였지만 많은 장벽과 싸워야 했다.
옛 소련 타지키스탄 출신인 신 코치는 1992년 천안 일화(현 성남)로 이적해 오며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신 코치의 활약은 대단했다. 1993년부터 1995년 천안의 사상 첫 K리그 3연패를 뒷받침했다. 당시 천안은 3년 연속 팀 최소 실점을 기록했는데 0점대(0.87) 실점률을 자랑한 그의 철벽 방어가 원동력이었다.
신 코치가 맹위를 떨치자 타 구단도 유고의 드라간 스크르바(포항제철·현 포항)와 러시아의 일리치 샤샤(유공·현 제주) 등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국내 골키퍼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국내 골키퍼의 기량 저하 가능성이 제기됐다. 급기야 K리그는 외국인 골키퍼 영입 제한 규정을 만들어 1996년부터 3년간 순차적으로 외국인 골키퍼 출전 기회를 줄여 1999년부터 골문을 지킬 수 없게 했다.
1998년 천안을 떠나 안양 LG(현 FC 서울)에서 플레잉 코치로 후배 양성에 힘을 쏟던 신 코치는 2000년 1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국내 축구 사상 처음 한국인으로 귀화해 다시 선수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이다. 그의 열정과 실력을 인정한 조광래 감독 등 구단 관계자들이 귀화라는 해법을 제시한 결과였다. 현역 선수로서는 환갑의 나이였지만 골문을 지키며 그해 안양을 K리그 정상으로 이끌었다.
○ 실력과 성실성이 생명력
2005년 선수에서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신 코치에게 찾아온 또 다른 장벽은 한국 특유의 ‘연줄 문화’. 국내에서는 비주류인 탓에 실력은 최고로 인정받으면서도 지도자로선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프로축구의 한 관계자는 “신의손은 학교, 지역 등 한국의 고질적인 연줄문화의 희생양이었다”고 전했다.
그를 끌어준 사람들은 프로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축구인들이다. 그를 겪어본 축구인은 그의 실력과 인격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지난해 초 대교 캥거루스 여자축구팀 코치로 갈 때엔 천안 시절 함께 한 안익수 감독이 불러줬고 안 감독에 이어 대교 사령탑을 맡은 박남열 감독도 천안 때의 인연으로 신 코치를 중용하고 있다.
○ 성공했지만 여운은 남는 한국 생활
신 코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적응엔 큰 문제가 없었다. 사람들이 잘 대해줬고 음식이나 생활에도 적응하기 쉬웠다. 다만 존댓말과 하대가 발달한 한국어는 정말 배우기 힘들었다. 아직 한국말은 잘 못한다”고 고백했다.
신 코치의 가족은 4명. 현재는 부인 사리체바 올가 씨(47)와 둘이서 경기 부천시에서 살고 있다. 딸 올가 씨(26)는 캐나다 밴쿠버의 빅토리아대에서 생명과학부 강사로 일하고 있고, 아들 예브게니 씨(24)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밟고 있다. 신 코치를 포함해 가족 모두가 성공적인 삶을 산 셈이다.
하지만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고민이 많았다”고 전한다. 철벽 방어로 우승을 많이 이뤄냈지만 최우수선수(MVP) 등 상이 국내 선수에게 집중돼 상복이 없었던 것도 연줄문화는 물론 혈연주의를 강조한 한국 문화에 피해를 본 것이었다. 대병 소주 한 병은 거뜬히 해치우는 주량이지만 술은 몸을 망치기 때문에 한 모금도 하지 않는 철칙을 세워 지켜왔는데 잦은 회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도 곤욕이었다는 게 그를 아는 지인들의 말이다.
신의손은 “모두 지난 얘기고 신경 쓰지 않았다”라며 “대표팀에서 ‘제2의 이운재(수원)’를 만드는 게 현재 최고의 목표”라고 말했다.
○ 한국에서 성공한 스포츠 이방인들
국내 최초의 용병은 1983년 포항제철(현 포항)이 영입한 브라질 출신 세르지오 루이스 코고와 호세 로베르트 알베스. 그들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떠났지만 그동안 국내 스포츠계에 이름을 떨친 외국인 선수는 많다.
축구에선 태국 출신 피아퐁(럭키금성·현 서울)이 1980년대 후반 K리그를 휘어잡았고 지금은 에두(수원 삼성) 등 브라질 출신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축구 지도자로선 2002 한일월드컵 때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며 일약 국민 영웅이 된 거스 히딩크 감독(네덜란드)이 대표적이다. 1998년 용병 제도를 도입한 프로야구에서는 펠릭스 호세(전 롯데)가 유명했고 제리 로이스터 롯데 감독은 ‘미국판 부산 갈매기’란 명성을 얻고 있다.
하지만 실력으로 평가받는 스포츠의 세계에선 움베르투 코엘류(포르투갈), 요하네스 본프레레(네덜란드) 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 등이 성적 부진에 보따리를 싸는 등 실패하고 돌아가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터키 출신 축구스타 알파이 외잘란같이 한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비행기를 탄 선수도 많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