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순수의 시대(Era of Innocence)’도 저물어간다”는 말이 들린다.
AIG 보너스 파문, 적자예산 등의 여파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누려온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만인(萬人)의 지도자’ 이미지가 탈색되어 간다는 뜻이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보람 있었던 일 중 하나가 오바마 시대 탄생을 지켜본 것이었는데, 그의 이미지에 세속 정치의 페인트가 덧칠되는 걸 지켜보는 건 안타깝다. 무구(無垢)한 시절이 끝나가는 아이를 볼 때와 같은 심정이다.
물론 ‘순수의 시대’에만 머무를 수 있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 아주 드물게 먼 훗날까지도 모든 이의 가슴에 남는 지도자는 ‘절대 선(善)’ ‘공동 선’이 존재하던 시절만 살다 스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슴이 뜨거운 젊은이들’의 우상인 체 게바라는 부패한 독재에 맞서 억압받는 민중 편에서 싸우던 단계에서 삶을 멈췄다. 만약 그가 오래 살아서 남미 어느 집권 공산당의 지도자로 커리어가 이어졌다면 민중독재, 빈곤을 초래한 실패한 정치인이란 이미지가 덧칠됐을지도 모른다.
식민지나 독재 시절엔 독립, 민주, 인권 같은 절대 선의 가치가 존재한다. 순수의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런 목표가 달성되면 각자의 이념적 준거집단에 따라 매사 가치 판단이 달라진다. 한국 사회는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순수의 시대에서 벗어났다. 그전까지는 ‘군부독재 종식’이란 목표 아래 진보 중도 보수를 망라한 사람들이 ‘민주연합군’을 형성했다. 가톨릭의 경우 훗날 2005년 동국대 강정구 교수 사건 때 노무현 정권의 실세 총리에게 모욕적 언사를 들어야 했던 김수환 추기경부터, 그 오만한 총리의 이념적 동지인 급진파 사제들까지 다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사회는 이념과 계층에 따라 선악 판단이 달라지는 단계로 진행했고, 반독재의 원(圓) 안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념적 좌표에 따라 횡렬로 늘어섰다. 물론 그런 변천은 미국 등 서구 사회도 다 겪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서구와 다른 점은 이미 상대성의 시대가 됐는데도 자신의 가치관을 만인의 대의(大義), 절대 선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그런 착각세력의 정점에는 이념적으로 다른 견해를 ‘부도덕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붙이던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서 있었다.
미국도 여야 간, 진보 보수 간 공방이 치열하다. 하지만 그런 공방을 선과 악의 대결로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야당이건, 여당이건, 사회단체건 자신들의 주장에 ‘민주 수호’ ‘독재 철폐’ 등의 수식어를 감히 붙이지 않는다. 극력 반대하다가도 다수결에 승복한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는 “한국 의회에서 툭하면 ‘반민주 저지’ ‘독재’ 등의 구호를 외치는 것은 사회의 진화 수준을 무시하는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이념적 대립이 심한 사회에서 좌우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물을 배출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지난달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에게 쏟아진 국민적 애도는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에게도 경이로운 현상이었다.
스탠퍼드대 신기욱 아태연구소장은 “미국에서도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 그리고 암살당한 링컨, 케네디, 마틴 루서 킹 등을 제외하면 민주·공화 지지 성향을 초월해 국민적 사랑을 받는 지도자를 찾는 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 이념 분열의 시대를 20년 가까이 살면서도 국민적 존경을 잃지 않은 ‘거인’ 앞에서 자신들의 이념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그를 폄하하려 했던 지난 정권의 핵심들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