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7위’ 공중분해… 비운의 기업인
“나는 죄 지은 것 없이 하루아침에 당했으며, 당시는 무법천지였습니다.”(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1993년 7월 29일 국제그룹 해체 위헌결정 직후)
양 전 회장(사진)이 29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그는 그동안 폐렴 증상으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오다 끝내 영면했다.
1921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공업학교를 졸업한 양 전 회장은 1947년 고무신 공장을 차려 신발사업과 연을 맺었다. 1963년 신발과 비닐제품 생산업체인 진양화학을 세워 1970년대 신발 수출 붐을 타고 큰 성공을 거뒀다.
양 전 회장은 각고의 노력 끝에 1980년대 재계 7위의 국제그룹을 일궈냈으나, 1985년 전두환 정권에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혀 그룹을 해체당했다.
국제그룹은 해체 직전 무역과 건설 신발 기계 철강 금융산업 등에 걸쳐 동서증권, 성창섬유, 국제상선, 조광무역, 국제토건 등 22개 계열사를 거느렸다. 1984년 매출액은 1조7900억 원으로 종업원이 3만8800명에 이르는 거대기업이었다.
해체 당시 정부는 “무리한 사업 확장에 따른 경영 부실”을 이유로 들었지만 양 전 회장이 일해재단 모금에 소극적이었고, 청와대에서 소집한 주요 그룹 총수 회동에 지각해 전 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1993년 국제그룹 해체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違憲) 결정을 내리면서 양 전 회장은 본격적인 그룹 재건활동에 나섰다. 1994년 한일합섬을 상대로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정부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사실이나, 이로 인해 개인 간 계약까지 무효가 될 수는 없다”는 법원 논리에 따라 패소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양희원 ICC 대표와 사위 권영수 LG디스플레이 대표, 이현엽 충남대 교수 등이 있으며,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영안실이다. 발인은 다음 달 1일 오전 9시, 장지는 천안공원묘원.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