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연기란 과연 어떤 연기일까? 영화 ‘레슬러(The Wrestler·5일 개봉)’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배우 미키 루크(57)는 진짜 자기의 삶을 연기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한때 잘나가다가 이젠 심장 질환을 앓는 퇴물 레슬러가 된 영화 속 주인공 ‘랜디’, 그는 1980년대 영화 ‘나인 하프 위크’(1986년) 등을 통해 섹시 아이콘으로 부상했다가 실제 복서로 돌변하면서 스스로 가족과 커리어를 내팽개쳐버리고 퇴물로 전락한 ‘인간’ 미키 루크의 삶과 고스란히 겹쳐지는 것이다.》
몸서리쳐질 만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주목할 대목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미키 루크의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러시아의 연극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고안한 사실적 연기론으로 배우의 내면이 등장인물의 내면과 포개지는 것)다.
면도날에 이마가 찢기고 온몸을 스테이플러로 공격당하는 피학적인 링 위의 상황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친딸에게 차갑게 외면당하는 서글픈 현실 속에서도 주인공 랜디(아니, 미키 루크)는 놀라울 만큼 표정을 자제하니 말이다. 고통을 표현하기보단 마음으로 잘근잘근 씹어 먹어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더 끔찍한 고통을 관객이 체감하도록 만드는 미키 루크의 연기는, 활화산처럼 폭발적인 연기력을 자랑하는 한국의 대표배우 설경구와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먼저, 이 영화와 설경구의 출세작 ‘박하사탕’(2000년)의 라스트 신을 비교해보자. 심장 이상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랜디. 이제 마지막 링이 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는 이런 무겁고도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사진①).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은 삶에 대한 회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링 위에서만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자기 숙명에 대한 미움과 자랑스러움이 공존하는 이 표정. “나 돌아갈래!”를 외마디 비명처럼 지르며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영호(설경구)의 마지막 표정(사진②)과 극심한 온도 차를 보인다.
미키 루크와 설경구는 고통을 표현하는 연기철학 자체에서 차이가 난다. 영화 ‘역도산’(2004년)에서 나타난 표정(사진③)에서 알 수 있듯, 설경구는 고통이라는 마른 장작에다 분노라는 휘발유를 뿌려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 그래서 고통을 모두 산화시키고 허무함이란 이름의 재를 남긴다. 반면에 미키 루크는 가장 끔찍한 고통을 느끼는 순간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사진④). 고통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느끼려 하는 나 자신에게 놀라 덜컥 겁을 집어먹는 지독한 내면을 표정으로 담아내는 것.
이런 미키 루크의 연기방식은, 그의 재기를 알린 ‘씬시티’(2005년)에서도 확실하게 포착된다. 살이 뜯기고 뼈가 부러져도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스트리트 파이터 역을 맡았던 그는 감정을 아예 거세당한 듯한(또는 고통을 막대사탕처럼 달콤하게 핥아먹는 듯한) 표정을 통해 오히려 해당 인물이 느끼는 고통을 증폭해 전달한다(사진⑤).
뜨거운 게 좋은 걸까, 아니면 차가운 게 좋은 걸까. 연기는 더하는 걸까, 아니면 빼는 걸까. ‘레슬러’의 미키 루크는 연기에 관한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