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경 평소 친분이 있던 모 코스닥 기업 최고경영자(CEO)로부터 자문 요청을 받았다. 모 외국계 은행과 환 헤지 계약을 했는데 환율이 급등하니 환차손이 눈 덩이처럼 커지고 있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필자가 계약서 내용을 보니 영어로 된 계약서는 깨알처럼 알아볼 수 없게 작은 글씨로 되어 있어서 법률전문가가 확대경으로 봐야만 해석이 가능한 정도였고 한글계약서는 아예 없었다. 내용을 보니 환 헤지 상품이 아니라 환율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면 손실이 계속 커지는 환투기상품(키코·KIKO)이었다.
필자는 즉시 이 상품을 해지할 것을 조언했다. 원-달러 환율이 1200원을 넘어서고 있었으며 평가손실이 70억 원에 이르고 있었다. 직전년도 이 회사의 연간 영업이익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환율이 떨어지면 평가손실이 없어질 텐데 괜히 해지할 필요가 있을까요?” 망설이는 그에게 필자가 한마디 했다. “만약 환율이 1500원으로 올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손실이 200억 원으로 늘어나게 됩니다”라는 대답을 하면서 기겁을 했다. 환율이 급등하면 해당 회사는 심각한 자금 부족 상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다행히 그 CEO는 고민 끝에 거액의 손실을 치르고 필자의 조언대로 계약을 해지했다. 만약 그때 해지하지 않았다면 회사가 지금쯤 자금 부족으로 파산했을 것이라며 필자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대부분의 CEO가 의외로 위기대응 능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 이번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여실히 드러났다. 은행 CEO들의 리스크 관리 능력 부족은 세계 금융시스템 붕괴를 초래했다. 제너럴모터스(GM)의 CEO인 릭 왜거너 회장이 해고된 이유 중 하나도 이번 구조조정안 마련 과정에서 위기대응 능력이 부족한 것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년간 17만 명의 종업원을 9만 명으로 줄이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1년간 주가는 무려 90%나 하락하는 시장평가를 받았다. 불경기에 대비해서 너무 늦게 행동한 것이다.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행동이 훨씬 더 빨랐어야 했다. 그가 이번에 제출한 구조조정안도 위기대응 능력이 부족함을 보여주고 있다.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진 현재의 상태가 3년간 지속된다고 가정할 때 매년 50억 달러의 현금흐름 부족이 발생하게 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제시하지 못하고 정부의 지원만 요구했다. 조만간 대형 은행 구제를 위한 미 정부의 스트레스 테스트가 끝나면 환경변화에 대한 대응능력이 부족한 은행 CEO들이 줄줄이 해고될 것으로 예상된다.
CEO는 평소 회사 내에 환경변화에 대응한 위기대응 프로그램을 갖고 있어야 한다. 환리스크 관리도 위기대응 프로그램의 하나다. CEO가 위기대응을 잘하려면 현금흐름표에 익숙해져야 한다. 해외 기관투자가들은 현금흐름표가 부실한 회사에는 절대로 투자하지 않는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손익계산서상 흑자기업임에도 불구하고 현금흐름표상 적자기업들은 대부분 도산했던 생생한 기억이 있다. 리스크 관리를 잘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에 따른 예상 현금흐름표를 작성해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한 현금흐름 관리를 항상 해야 한다.
박춘호 이토마토 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