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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자에게 창의력을 묻다]美 앤드루 파이어 교수

입력 | 2009-04-02 02:58:00


“한국, 의대 쏠림 지나쳐… 5∼10년 뒤엔 기초과학이 절대적”

인터뷰=이현두 교육담당 데스크

《올해 국내 교육계의 화두는 창의력이다. 최근 대학들이 앞 다퉈 입학사정관제도를 확대하고 있는 것도, 정부가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 프로젝트를 마련해 노벨상 수상자 초청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도 모두 창의력 있는 인재 발굴을 위해서다. 노벨상 수상자에게 직접 ‘창의력 교육’의 길을 물어봤다.》

美서도 영재교육 하지만 사회적 여건 따라 달라

호기심 갖는 분야 더 많이 배울 기회 필요

내 아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있다면 전폭적으로 지원

관심의 끈을 놓지 않게 해야

“월드시리즈 9회말 역전 찬스에 적시타를 때린 타자를 생각해 보세요.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그런 기회를 꿈꾸지만 원한다고 기회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만 메이저리거가 아니라면 그런 기회를 잡을 수는 없겠죠. 한국 과학도 이제 충분히 메이저리거 자격을 갖췄어요. 누가 홈런을 때리느냐 하는 것은 역사의 우연(accident of history)일 뿐이죠.”

24일 오전 11시. 서울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 자연과학관 강의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미국 교수가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 놓고 RNA간섭(RNA interference) 이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학부생과 대학원생 100여 명은 숨을 죽인 채 강의에 집중했다. 강단에 선 교수는 앤드루 파이어 스탠퍼드대 교수(50)였다. 그는 두 가닥 꼬인 모습의 ‘이중나선 RNA’가 새로운 유전자가 생기는 걸 막아주는 ‘RNA 간섭’ 현상을 처음 발견했고, 그 공로로 200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전까지는 RNA가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만 한다고 알려졌으나 이 방식을 응용하면 암세포 등 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미리 막을 수 있게 됐다. 새로운 유전자 조절방식을 찾아낸 것이다.

간간이 유머를 섞어가며 1시간 동안의 열정적 강의를 마친 그는 “세계를 바꿀 재목이 많이 보인다. 나는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하는데 학생들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며 놀라워했다. 파이어 교수는 교육과학기술부가 시행 중인 WCU 프로그램으로 한양대 석좌교수에 임용돼 22일 입국했다.

그는 한양대에서 네 차례 강연과 토론식 수업을 하고, 한양대 안주홍 교수와 함께 공동 연구실의 문을 여는 등 1주일을 숨 가쁘게 보낸 뒤 28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0월 한국을 다시 찾을 예정이다.

열아홉 살 때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를 졸업한 그는 스물네 살 때 매사추세츠공대(MIT) 대학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월반(越班)을 계속한 것을 보면 수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을 것 같은데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나.

“어릴 때는 놀기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독서를 좋아해 과학 서적은 물론 공상과학(SF) 소설도 많이 읽었다. 욕조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것도 좋아했다.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실험 자체를 즐겼다.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이었다. 또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 아버지 덕분에 당시로서는 드물게 컴퓨터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컴퓨터를 통해 논리력을 많이 기른 것 같다.”

―혹시 학교 수업 이외에 다른 보충 교육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전부 공립학교를 나왔다. 사립학교에서 심화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방과후 수학 교실에서 심화 학습을 받기는 했다. 심화 학습을 통해 친구들보다 대학에 빨리 진학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최근 영재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영재만을 모아 별도의 교육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내가 호기심을 느낀 분야를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기회다. 그런데 미국도 지역 사회에 따라 영재교육을 하는 방식이 다르다. 볼티모어는 과학고를 만들어 수학 과학에 재능을 보이는 학생을 따로 가르친다. 선택과 집중 방식이다.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다양한 수준의 학생들이 한데 어울리는 전인적인 교육을 강조한다. 어떤 쪽이 더 좋은지는 사회적 여건에 따라 다르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공부를 잘하면 의사나 판사 검사가 되라는 권유를 많이 받는다. 혹시 당신도 부모님이 다른 길을 권하지는 않았었나.

“어린 시절 음악을 좋아해 첼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부모님이 말리셨다. 음악을 해서 먹고살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수학이나 생물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는 그런 말씀이 없으셨다. 전적으로 밀어주셨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MIT 대학원에서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꾼 이유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수학적 도구로 세상을 묘사하는 일이 아주 즐거웠다. 그리고 솔직히 어렸기 때문에 대학 진학 때 수학을 선택한 측면도 있다. 어른이 되면 순수 학문을 해서는 돈을 벌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과학자를 꿈꾸던 사람들도 엔지니어가 되고 만다. 대학 진학 때만 해도 나는 어렸고 아직 그런 것을 잘 몰랐다.

지금도 여전히 수학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수학은 전문적인 수학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다. 또 수학적 발견이 실제로 인류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시간도 꽤 오래 걸린다. 천재적인 학자가 아니면 그런 발견을 하기도 어렵다. 그에 비해 생물학적 발견은 질병 치료 연구로 이어져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인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또 생물학은 많은 사람의 참여로 발전한다. 많은 생물학자가 각각 다른 연구를 하지만 결국 그것들이 하나로 묶여 발전해 간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할 때 마침 생물학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이 많이 나온 것도 전공을 바꾸는 데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는 이공계 기피 현상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공계를 선택한 학생들도 의대로 쏠리고, 의대에 진학한 학생들은 연구보다는 대부분 의사가 된다. 생물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환자를 치료하는 교육을 받는 것도 순수 과학 연구만큼 중요하다. 의학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에게 순수 학문을 강요할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단지 사회적 조건 때문에 의대를 선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 분야 종사자를 찾아 조언을 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게 조언을 구한다면 ‘5년, 10년 후에는 기초 과학이 절대적이 될 것이다. 따라서 기초 과학 실력 없이는 절대 훌륭한 의사가 나올 수 없다’고 답하고 싶다.”

―흔히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맞춰 전공을 선택하라고 한다. 스스로의 소질과 적성을 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그걸 내가 알고 있다면 아주 큰 부자가 됐을 것이다. 그 방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돈을 받으면 될 테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기회를 허투루 보지 않는 것이다. 항상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한테는 이 길뿐이다’ 하고 가다가도 뜻하지 않은 장애와 난관을 마주할 수 있다.

순간순간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가 중요하다. 사업이나 학문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변화에 빨리 대처한다. ‘내가 가는 길이 정말 옳은지, 더 나은 길은 없는지’ 항상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유연함을 길러주는 것은 그래서 교육에서도 중요하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어린 시절 당신의 꿈에는 노벨상 수상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또 노벨상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노벨상을 목표로 연구해 오지는 않았다. 1998년 ‘네이처’지에 처음 논문을 발표할 때만 해도 노벨상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잘못된 것을 발표한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논문 발표 이후 다른 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해 우리 논문의 가치가 발견될 수 있었다.

이 분야에서 내 연구가 인정받는다는 것은 물론 기쁜 일이다. 하지만 노벨상은 덤으로 주어진 행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연구에 매달리는 것, 노벨상을 타기 전이나 후나 내가 하는 일은 그것뿐이다.”

―대한민국은 이공계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싶어 한다. 한국이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나.

“한국은 과학 수준이 높은 나라다. 이미 과학 발전에 기여한 학자도 많고 열정적인 학생도 많아 미래도 아주 밝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노벨상을 탈 만한 자격은 이미 갖췄다. 아직 역사의 우연이 찾아오지 않았을 뿐이다.

1970년대 MIT에서 아주 훌륭한 한국 학생을 많이 만났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순수 과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도전이었다. 한국뿐 아니라 많은 나라가 그랬다. 그 학생들은 미국에 남아서 연구를 계속했고 미국 과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오는 학생이 많이 늘었다고 들었다. 한국 과학도 점점 더 좋아질 것으로 본다.”

―생물학자인 만큼 줄기세포에도 관심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에서 줄기세포 연구를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연구 재개 움직임이 있다. 당신의 견해를 듣고 싶다.

“줄기세포가 생물학 연구의 절대 선(善)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줄기세포 연구는 생물학의 한 분야일 뿐이다. 과학계에서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면 대중들 사이에 설렘과 흥분이 퍼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줄기세포 연구 성과가 어떨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가 너무 어렵다. 줄기세포가 당뇨병, 파킨슨병, 암 같은 병에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얘기되는 것도 문제다.

줄기세포가 인체에 들어갔을 때 암 세포처럼 기능할 우려도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줄기세포는 사회적, 윤리적 문제와 깊게 결부돼 있다. 이 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다. 줄기세포가 모든 문제 해결의 시발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버려야 한다.”

―당신은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또 당신의 자녀들이 어떻게 성장하기를 바라는지 말해 달라.

“어떤 가치 하나로 꼽기는 어렵다. 많은 덕목 간에 균형감을 이루고 부족한 부분을 줄여나가는 것, 그 과정을 추구하고자 한다. 5년 전 스탠퍼드대로 옮긴 이후 의대와 공동 연구를 많이 진행했다. 이 연구가 동료는 물론 인류 전체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아이들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일로 먹고살 수 있는 것을 찾길 바란다. 그것을 찾는다면 전적으로 지원해주겠다.”

정리=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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