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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

입력 | 2009-04-02 13:39:00


[ 거부할 수 없는 매력 ]

"저는 오늘 밤 'KIA TX350'과 한 몸이 됐어요."

몽환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럭셔리 세단 'KIA TX350'이 고속도로를 활주한다. 자동차와 아스팔트가 하나가 되고, 운전자와 자동차가 하나가 되는 '끈적한 느낌'이 화면에 스민다. 그리고 장면 전환. 자동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졸리 더 퀸'이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진다. "저, 오늘도 좋았어요."

그녀의 "저, 오늘도 좋았어요."가 장안의 화제다. 무슨 질문을 하든 사람들은 '졸리 더 퀸'의 끈적이는 어투로 "저 오늘도 좋았어요"를 연발한다. '배틀원 2049'가 시작된 6월부터, 배틀원 출전 로봇들이 출연하는 TV 광고가 여럿 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졸리 더 퀸'의 '기아자동차 뉴 럭셔리 세단 광고'는 최고 인기다.

기아자동차는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대 기계공학과 교수팀과 서울 사이스트(SAIST) 테크노-기술경영팀이 함께 만든 '졸리 더 퀸' (뉴욕, 우승확률: 11/100) 개발을 오랫동안 후원해 왔다. 가벼우면서도 강한 로봇 스킨과 섹시한 디자인, 손과 발에 부착된 강력한 엔진 등이 자동차에도 그대로 적용되기에, 기아는 기꺼이 로봇 개발을 후원하겠다고 나섰다.

그로부터 8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것 같았던 그들의 투자는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고, 3년 전부터 '졸리 더 퀸'은 강력한 우승후보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로봇으로 각광받았다. '졸리 더 퀸'에게 수많은 광고 제의가 있었지만, 그녀는 2년째 기아자동차의 메인 모델이다.

32강전이 끝나고 잠시 로봇정비 기간 동안, '데스 매치' 출전 로봇들은 쇼케이스(Showcase)를 돌며 팬덤을 몰고 다녔다. 6월 26일에는 혼다자동차로부터 후원을 받은 자이언트 바바 III (히로시마, 우승확률: 8/100)와 무사시 (동경, 우승확률: 25/100), 메탈릭 신센구미 (오사카, 우승확률: 2/100)가 한 자리에 모여, 쇼케이스를 열었다. 이들은 모두 히로시마, 동경과 오사카에 각각 본부를 둔 혼다자동차 연구팀이 후원하는 로봇들이다.

무사시는 무뚝뚝하고 개인기가 별로 없는데 반해, 코믹스러운 자이언트 바바 III는 자신의 입에서 인기가수 루루의 노래를 나오게 하면서 립싱크를 해 여성 흉내도 내고, 어울리지 않는 발레 댄스를 춰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강력한 우승후보인 무사시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날 쇼케이스에선 자이언트 바바 III가 주인공이었다.

"전 히로시마에서 왔지만, 이 가슴에는 서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가슴 부위에선 빨간 액체가 빠르게 돌며 '서울'이라는 글씨를 만들었다. 서울특별시민은 누구나 환호성과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자이언트 바바 III를 후원했던 주식회사 '유진 로봇'은 오랫동안 가정용 로봇 개발을 해온 로봇 기업의 명가다. '유진상사'라는 중소기업으로 출발해 가정용 로봇과 교육용 로봇에 주력해 2015년 이른바 '국민로봇 시대'를 열었던 기업이다. 그들이 오사카 혼다자동차 연구팀과 손잡고 2037년부터 자이언트 바바 시리즈를 공동개발하기 시작했다. 작년에 완성된 자이언트 바바 III는 지난 12년의 공동연구의 땀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자이언트 바바 III의 가슴에는 서울의 땀이 배어있었다.

2049년 6월 27일, 서울 청담동 르노-삼성 쇼룸에서 열린 우승 후보 로봇 쇼케이스는 수많은 인파로 붐볐다. 건물 5층 크기의 전시관이 전면 유리로 돼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쇼룸은 이 지역의 랜드마크다. 32강전을 가뿐히 통과한 로봇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닥터 루스벨트 (동경, 우승확률: 1/100)와 라이징 브라이거 (로마, 우승확률: 1/200)는 32강전을 치르면서 생긴 고장 때문에 정비를 이유로 불참했다.

'16강 쇼케이스'라고 이름 붙여진 이날 행사에 참가한 로봇들 중에서 도박사들이 우승 후보로 꼽은 몇몇 로봇들은 이미 식전부터 집중 인터뷰 대상이 됐다. 기자들은 로봇개발팀과 후원사들의 인터뷰를 따느라 바빴다. 출전 로봇과 로봇개발자들 그리고 후원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쇼케이스의 광고 효과는 후원사들이 지난 몇 년간 지원했던 연구비보다 훨씬 컸다.

쇼케이스가 시작되자, 이 자리를 축하하기 위해 인기 로봇 팀 '메카닉 듀오'가 화려한 댄스와 힙합으로 분위기를 달궜다. 이어 등장한 로봇들. 카메라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번쩍였다. 그 중에는 에서 온 로봇기자도 여럿 눈에 띄었다.

제일 먼저 작년도 우승 로봇 슈타이거 (베를린, 우승확률: 12/100)가 등장했다. 베를린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만든 이 로봇은 BMW사가 후원하는 로봇으로, '돌려차기'가 일품인 로봇이다. 한 다리는 바닥에 붙이고 다른 다리를 몸과 함께 돌려차는데 걸리는 시간은 0.18초. 엄청난 모멘트를 순식간에 전달하는 이 파괴적인 회전력은 BMW의 초강력 엔진에 그대로 사용됐었다. 슈타이거가 무대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슈타이거에 이어 졸리 더 퀸과 M-ALI (예루살렘, 우승확률: 7/100), 자이언트 바바 III, 풀메탈패닉 K (덴버, 우승확률: 4/100), SRX 9000 (브리스톨, 우승확률: 4/100), 그리고 무사시가 무대로 올라왔다.

올해 최대 화제 로봇은 단연 무사시다. 도박사들은 무사시의 우승확률을 작년도 우승 로봇 슈타이거보다 두 배나 높게 잡았다. 혼다에서 개발한 초강력 합금을 두 팔 스킨에 장착하였고 자동차 엔진을 변형시켜 어깨에 달았기 때문에, 무사시의 펀치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그는 올해 개국 기념 평가전에서 글라슈트 (서울, 우승확률: 2/100)를 무참히 짓밟는 기량을 선보여 도박사들에게 더욱 후한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무사시의 표정은 오늘도 무뚝뚝했다.

"올해 당신의 최대 적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SBS 이민호 기자가 무사시에게 자극적인 질문을 던졌다. 한 동안 정적이 흘렀지만 무사시는 답이 없었다.

"저희 무사시는 지난 해 변형 자동차 엔진을 통한 빠른 어깨 회전과 다리 회전,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는 칼날 같은 손놀림에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약점으로 지적되던 머리와 목 부분도 두 손으로 막는 기술을 통해 극복했다고 자부하구요. 올해는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두리라 생각합니다."

무사시를 개발한 리우데자네이루 로봇아트센터 소속 로봇공학자 히로유키 나카지마가 자동번역기를 통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슈타이거를 만드신 마틴 구레츠키 박사는..."

에서 온 빈센트 노호 기자가 마틴 구레츠키 박사에게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무사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나는 다른 선수들의 기량은 잘 모릅니다. 다만 나는 내가 작년 한 해 동안 공격 기량이 230% 이상 향상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2위를 했던 작년 대회를 분석한 결과, 올해는 그때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측합니다."

장내는 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운동기능은 세계 최고지만, 무사시는 순발력 있는 판단이나 감성적인 단어사용 등의 인지 기능은 다소 떨어지는 듯 보였다. 객석을 살피지도 않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켰기에 음흉한 기운을 더했다.

"슈타이거를 만드신 마틴 구레츠키 박사는 도박사들이 무사시를 우승후보 1순위로 꼽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빈센트 노호 기자가 정적을 깨기 위해 질문을 고쳐 던졌다.

"저는 졸리 더 퀸이나 M-ALI 가 무서운 우승 후보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량도 뛰어날 뿐 아니라, 머리를 쓰는 기술이 보강된 로봇들이라서 쉽지 않은 시합이 되겠지요. 저희도 준비를 많이 해서, 지능적인 방어와 순발력 있는 공격으로 승부를 걸어보려고 합니다. 많이 응원해 주십시오."

마틴 구레츠키 박사는 전년도 우승로봇을 만든 과학자답게 겸손하게 대응했다.

이날 약 4시간 30분간 지속된 '16강 쇼케이스'는 화려하고 유쾌했으며 분위기도 대체로 화기애애했다. 간혹 우승후보 로봇들간의 신경전도 있었지만 오히려 흥미를 더했다. 자이언트 바바 III는 이 자리에서도 코믹 댄스로 기자단과 팬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선사했다.

쇼케이스에서 글라슈트와 최볼테르 교수를 주목한 기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