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
푸른눈의 한국인이 평생 가꾼 ‘비밀의 화원’
○ 목련꽃 보물동산… 전 세계서 500여 종 모아
충남 태안반도의 천리포수목원은 고즈넉하다. 시골 예배당같이 정갈하면서 느긋하기까지 하다. 봄은 이제야 슬슬 몸을 풀고 있다. 바닷가라 서울보다 10일 이상 늦다. 바다에서 달려오는 갯바람도 여전히 맵싸하다. 눈밭에 피는 노란 복수초가 지각한 줄도 모른 채 헤헤 웃는다. 버드나무 가지에 연둣물이 막 오르고 있다. 제비꽃이나 노루귀꽃도 한참 늦게 꽃봉오리를 열었다. 노란 수선화 꽃은 아예 “나 예쁘지” 하며 하늘하늘 뻐긴다. 원래 땅을 굽어보는 꽃인데 봄바람이 단단히 들었다. 산수유 매화도 막 봉오리를 틔운다. 참 철들도 없다.
천리포수목원은 목련꽃 보물동산이다. 4월은 바야흐로 목련꽃 세상이다. 전 세계 목련 500여 종이 뿌리내려 산다. 1997년엔 국제목련학회 총회가 열리기도 했다. 흔히 보는 중국 원산 백목련이나 자목련은 여기에선 명함도 못 내민다. 겨울에 꽃을 피우는 목련도 있다. 8월쯤 꽃피어 12월에 지는 사철 푸른 ‘상록성 목련’이 그것이다. 잎과 함께 5, 6월에 노란 꽃을 피우는 황목련, 잎이 가느다랗고 꽃잎이 18개나 되는 별목련, 꽃보다 잎이 먼저 피는 토종 산목련(함박꽃나무)과 일본목련(후박나무)….
한라산 토종 목련도 눈에 띈다. 꽃봉오리가 어린아이 종주먹 모양으로 앙증맞다. 색깔도 옥양목처럼 눈부시다. 하지만 국제학계에서는 일본식 이름 ‘고부시(kobus)’로 통한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가 발견해서 보고한 탓이다.
목련은 꽃봉오리가 5∼10%쯤 벙글 때가 으뜸이다. 타조머리 닮은 보송보송 솜털 틈새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해인 시인에게 백목련은 ‘누구라도 사랑하고/누구라도 용서하는/어진 눈빛의 여인’(‘백목련’ 부분)’이다. 자목련은 ‘어느 날의 상처도/꽃으로 치유하는/자색의 등불’(‘자목련 아가’ 부분)이다.
백목련이나 자목련 꽃은 하나같이 북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북향화(北向花)라고 부르는 이유다, 보통 나무나 꽃은 해바라기를 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왜 백목련이나 자목련은 북쪽으로 향할까. 학자들도 그 까닭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오히려 전설이 그럴듯하다. 하늘나라에 얼굴이 백옥같이 흰 옥황상제 딸이 있었는데, 그 공주는 어쩌다 북쪽바다의 신을 사모하다가 죽고 말았다. 얼마 후 공주의 무덤에선 하얀 목련꽃들이 피어났고, 그 꽃들은 모두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득 만해 한용운 선생(1879∼1944)이 떠오른다. 선생은 말년에 서울 성북동 북향집에서 살았다. 1933년 집을 지을 때 조선총독부 건물을 마주 보기 싫다며, 남쪽과 등지게 집을 지었다. 선생은 그렇게 11년 동안 그곳에서 꼿꼿하게 살다가 눈을 감았다.
○ 아시아 처음으로 ‘세계의 수목원’ 인증받아
천리포수목원은 미국에서 귀화한 민병갈 선생(1921∼2002)의 에덴동산이었다. 민 선생의 미국 이름은 칼 밀러. 그는 1945년 연합군 일원으로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1979년 이 땅에 귀화한 후, 모든 돈과 몸, 마음을 수목원 가꾸는 데 쏟았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꽃과 나무 가꾸는 데만 힘썼다. 한국식물도감이 닳고 닳도록 공부했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씨앗과 묘목을 들여왔다. 그 누구보다도 한국의 초가집을 좋아했고, 한국의 낮은 산들을 사랑했다. 그는 30년 가까이 61만8397m²(18만7000여 평)의 수목원을 텃밭 가꾸듯 가꾸다가 눈을 감았다. 마치 백목련꽃이 눈부시게 피었다가 어느 날 아침 처연하게 지는 것처럼 살다가 갔다. 그는 그만큼 목련꽃을 좋아했다. 그가 매일 어머니를 생각하며 절했다는 ‘민병갈 목련’ 혹은 ‘어머니 목련’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2002년 그가 이 세상을 떠나자 그 해엔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한다.
‘이별의 고통보다 차라리/죽음의 축배를 드는 연인처럼,//화려한 봄의 절정에서 처연하게/목숨을 던지는구나, 목련!’(오세영 ‘목련꽃 2’ 부분)
천리포수목원엔 1만5000여 종의 식물들이 산다. 호랑가시나무가 600여 종, 동백나무 400여 종, 단풍나무 300여 종, 무궁화 250여 종 등 진귀한 보물들이 많다. 빨간 잎이 노란 잎으로 변했다가, 다시 초록 잎으로 바뀌는 삼색 참중나무, 민병갈 선생이 세계 최초로 발견하여 국제학회 호적에 올린 완도호랑가시나무, 요즘 노란 면류관 꽃을 닭 벼슬같이 달고 있는, 가지가 3개로 갈라진 삼지닥나무, 역시 요즘 한창 하얀 꽃을 피우고 있는 멸종위기의 미선나무, 봄과 가을 두 번씩 꽃을 피우는 가을벚꽃나무, 가지가 구불구불한 용트림매실나무….
유럽인들이 ‘사순절의 장미’라고 부르는 자줏빛 헬레보루스 꽃도 한창이다. 사순절은 부활주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40일 동안의 기간으로 올해는 2월 25일부터 시작된다.
천리포수목원은 여러 지역으로 나뉜다. 해당화 통보리사초 등이 자라는 사구원, 수선화 상사화 수련 어리연 등이 사는 수생식물원, 매화마름 가시연꽃이 있는 습지원, 호랑가시나무가 사는 감탕나무원, 억새 노루오줌 종류의 터전인 노루오줌원, 원추리원, 만병초원 등이 그것이다.
천리포수목원은 2000년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 12번째,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받았다.
천리포수목원엔 연못이 2개 있다. 연못가엔 노란 수선화 꽃이 웃고 있다. 하얀 설강화 꽃들이 눈 내린 듯 바람에 흔들거린다. 그 옆에는 낙우송 뿌리가 낙락장송처럼 우둘투둘 솟아 있다. 수양버드나무 가지가 능청능청 살랑거린다.
민 선생은 청개구리를 좋아했다. 평소에도 늘 “난 다시 태어난다면 청개구리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 연못에선 한낮에도 개구리 울음소리가 은은하다. 아이들 책 읽는 소리 같다. 스님들 경 읽는 소리로도 들린다. 정겹고 감미롭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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