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꼬리표 떼고 세계로 날갯짓
메디슨은 한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스타 벤처기업’이었다. 국내 처음으로 초음파 의료 진단기기를 개발해 짧은 기간에 이 분야의 국내 간판기업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후반 벤처 붐이 불었을 때 이 회사 창업자인 이민화 전 회장은 ‘벤처의 대부’로 군림했다. 그러나 무리한 확장은 재앙을 불렀다. 자금 순환 고리가 끊어지면서 2002년 갑작스러운 부도를 맞았다. 많은 사람이 메디슨은 그대로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취재를 위해 1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메디슨 사옥을 찾아갈 때만 해도 침체된 부도 기업의 풍경을 떠올렸다. 지금은 관계가 완전히 정리됐지만 ‘이민화=메디슨’이라는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마침 이날 이 회사의 신임 대표이사인 손원길 부회장 취임식이 열렸다. 입구부터 축하 화환이 잔뜩 늘어서 들뜬 분위기가 가득했다. 세 들어 살던 건물은 아예 인수를 했다. 빌딩 내부에는 “메디슨이 이 건물을 사들여 빌딩 이름이 ‘디스커서 앤 메디슨 빌딩’에서 ‘메디슨 빌딩’으로 바뀌었다”는 공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 목표 세워 4년 만에 부활에 성공
2002년 “잘나가던 메디슨이 한순간에 망했다”는 소식은 세계 곳곳의 병원에 퍼졌다. 의료기기의 문제로 진단이 잘못되면 의사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망한 회사의 제품을 반길 리 없었다. 병원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시 영업본부장을 맡았던 이중호 부사장은 메디슨이 건재하다는 걸 증명하려 이 분야 최대 학술행사인 세계초음파의학회(WFUMB)의 서울 개최를 자청했다. 걱정하는 조직위원회를 안심시키려고 메인 스폰서 후원금도 예정보다 빨리 냈다. 메디슨은 학회 개최를 결정한 직후 “학회가 서울에서 열리는 2006년엔 무조건 법정관리를 탈출한다”는 내부 목표를 정했다. 그때부터 메디슨의 부도를 우려하는 고객이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든 찾아가 직접 만났다. 이 부사장은 지금도 항상 여권을 휴대하고 차 트렁크에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
“전 세계의 고객을 직접 만나는 ‘맨투맨(man-to-man) 투어’를 시작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병원까지 안 가는 곳이 없었죠. 제품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찾아가 점검을 해주니 고객들이 불안감을 떨쳤습니다. 2006년 법정관리에서 벗어나겠다는 목표 때문에 한시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죠.”
이에 힘입어 매출과 영업이익은 2002년 각각 1170억 원, 61억 원에서 2008년 2299억 원, 441억 원으로 수직상승했다. 시장점유율도 2004년 9위(2.5%)에서 2007년 6위(7.2%)로 올라섰다. 미국의 GE, 독일의 지멘스, 네덜란드의 필립스 등 세계 유수의 기업과 싸워 이룩한 성과였다. 메디슨의 목표는 거짓말처럼 실현됐다. 4년이 지나 2006년 WFUMB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렸다. 학회 기간 중 메디슨이 학회 참가자들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메디슨의 밤’ 행사가 있었다. 행사가 무르익을 즈음 법원이 법정관리 종결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이크를 잡고 참석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 사업 확장하며 새 출발
메디슨은 위기를 딛고 부활한 비결은 핵심역량을 지켜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본업을 벗어나 ‘벤처 연방(聯邦)’을 표방하며 무리하게 50여 개 회사에 투자하다 자금난으로 부도가 났지만 초음파 진단기기 기술에 대한 투자는 멈추지 않았다. 이 회사는 법정관리 기간에도 3차원 동영상을 보여주는 초음파 진단기기 ‘아큐빅스’를 내놓는 등 회생의 발판을 만들어 왔다. 똘똘 뭉친 직원들도 부활의 원동력이 됐다.
부도가 난 어려운 시기에도 직원들의 월급이 제때 안 나온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핵심 연구원들이 빠져나가면 회사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이 때문인지 부도 직후 경쟁 업체의 스카우트 제의가 많았지만 회사를 떠난 직원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직원들은 “가장 힘든 것은 회사의 부도가 아니라 부도 직후 한두 달 동안 야근이 없어진 것”이라며 서로를 응원했다.
재기에 성공한 메디슨은 초음파 진단기기 외에도 X선, 내시경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다. 국내 의료기기 업체들과의 동반 성장을 위한 다양한 협력에도 나서기로 했다. 1대 주주인 칸서스PEF의 손원길 대표가 직접 메디슨의 경영을 맡으며 회사를 한 단계 키우기 위한 움직임이 빨라졌다. 손 부회장은 “경제위기로 외부 환경이 어렵지만 덩치가 큰 경쟁업체보다는 더 유리한 기회”며 “초음파 전문 기업이 아닌 글로벌 의료기기 종합회사로 성장해 더는 벤처기업이 아닌 대한민국 대표 기업이 되겠다”고 말했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