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아닌 삶터” 빌딩숲 속 옹달샘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는 딱딱하고 밋밋하다. 일렬로 늘어선 유리 커튼월(통유리로 감싼 벽면) 또는 철골철근콘크리트 직육면체 건물들은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문 듯 무뚝뚝해 보인다. 지난해 3월 완공한 ‘엔씨소프트 서울 연구개발(R&D)센터’는 이 심심한 거리에 경쾌한 파격을 준 이질적인 랜드마크다.》
오피스빌딩이 가득 들어선 거리가 무표정해지기 쉬운 것은 그 건물들에 대개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땅값이 비싼 도심에 들어서는 임대사무실 건물은 가급적 건축 면적을 최대로 하면서 저렴한 재료를 쓴다. 오피스 타운은 자연히 뚱뚱하고 무성의한 네모꼴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엔씨소프트 R&D센터 건축주인 김택진 사장(42)은 ‘사람 사는 집 같은’ 오피스빌딩을 원했다.
○ 숙식 잦은 직원 위해 최대한 집처럼 꾸며
엔씨소프트는 ‘리니지’로 유명한 게임회사다. R&D센터 주변은 부스스한 머리의 캐주얼 차림 직원들로 북적인다. 출시가 임박한 신작 게임 개발팀원이 한두 달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게임 개발로 성공한 이 회사 리더가 ‘사람이 살 만한 공간’을 짓고 싶어한 것은 당연했다.
설계자인 건축가 박승홍 씨(55)는 “눈 쌓인 창턱, 빗물 듣는 처마가 보이는 건물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흥미로워서 더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스케치북 하나 앞에 놓고 격식 없는 대화를 여러 차례 나누며 디자인의 뼈대를 조금씩 함께 만들었습니다. 막연하게 제시하는 꿈을 손에 잡히는 재료로 그에 맞게 지을 수 있는 그림을 그려 나간 거죠. 건축에서 ‘주인’이 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그런 과정에서 새삼 많이 배웠습니다.”
엔씨소프트 R&D센터를 이웃 건물보다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흰색과 진회색을 엇갈려 배열한 외벽 창호 프레임이다. 커튼월 위에 30cm 돌출시켜 덧댄 알루미늄과 화강석 창틀은 이 건물에 남다른 표정을 입혔다. 프레임 높이는 1.4m, 폭은 2.8m다. 한 층에 3개씩 들어가는 프레임은 지하 7층, 지상 15층의 건물을 더 높아 보이게 만든다.
비 오는 날 창문 밖의 화강석 창턱에서는 빗물 방울이 똑똑 운치 있게 떨어진다. 1층 대로변 사각 돌기둥 사이에 서서 비를 피하는 행인 앞에 떨어지는 것은 41단의 진회색 처마에 잠깐씩 고였다가 한 단씩 내려온 빗물이다.
○ “창턱-처마 등 기분전환에 큰 도움”
개발기획팀 박민재 차장은 “오랜 시간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이 회사 사람들에게는 몸은 물론 마음의 컨디션 유지도 중요하다”며 “창밖을 바라보는 소소한 재미는 기분전환에 적잖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1층 입구에서 올려다본 흰색의 수직 알루미늄 프레임은 흘러내리다 멈춘 ‘테트리스’ 벽돌을 닮았다. 블라인드가 불규칙하게 여닫힌 외벽이 디지털 매트릭스를 연상시킨다는 견해도 있다. 건축가 박 씨는 “소박하게 기능을 추구하다가 자연스레 얻은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옥상 정원은 비스듬히 꽂아 세운 철제 빔으로 둘러쌌다. 이 커다란 반(半) 개방 난간은 바깥 공기 쐬러 나선 직원들을 깊고 아늑한 느낌으로 감싼다. 각각 1개 층의 절반을 차지한 피트니스센터와 직원자녀유아원은 ‘사람 사는 공간’이 겉모습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건물의 준공을 알리는 초석(礎石) 맨 윗줄에는 건축가의 이름이 새겨졌다. 한국에서는 이례적인 일. 박 씨는 이름 아래 ‘단순하고, 참신한, 장인정신이 깃든, 집’이라는 말을 더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