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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박세리’ vs 금융위기 ‘김연아’ 닮은 점과 다른점

입력 | 2009-04-04 02:55:00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는 연못가에 공이 떨어지자 ‘맨발 투혼’을 발휘해 극적인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해냈다” 김연아가 지난달인 3월29일 열린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자신의 프리스케이팅 점수가 발표되자 물병을 감싸 쥐며 환호하고 있다.[연합]


#1998년7월7일 미국 위스콘신주 블랙울프런GC.US여자오픈골프 플레이오프 연장 18번 홀에서 박세리(당시 21)의 티샷이 경사진 러프에 빠졌다. 승리는 추아시리폰(당시 21)에게 돌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양말을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간 박세리는 흔들림 없는 샷을 던졌고 공은 러프를 탈출했다. 동타를 이룬 박세리는 결국 버디를 낚아 극적인 역전 우승을 했다. 하얀 발과 검게 그을린 발목. 92홀까지 가며 보여준 불굴의 의지. 외환위기로 지쳐있던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 2009년 3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센터에서 열린 세계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19)가 여자 싱글 사상 첫 200점을 돌파하며 우승했다. 2위와의 차이가 16.42점일 정도로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했다. 김연아는 쇼트보다 약하다고 평가받던 프리에서도 림스키 코르샤코프의 '세헤레자데 작품 35번'에 맞춰 물 흐르듯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 1만 7000여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보냈고 전광판에는 세계 신기록이 떴다. 10년 만에 또 다시 찾아 온 경제 위기. 김연아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우리의 어깨도 모처럼 쫙 펴지는 듯 했다.

박세리가 맥도널드 챔피언십에 이어 US오픈까지 석권했던 당시 나이는 21살.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올해 나이는 19살. 10년이라는 시간차는 있지만 약관의 두 여자 선수가 경제 위기에서 '희망 바이러스'로 떠올랐다. 이 외에도 두 선수는 공통점이 많다.

● 공통점 ① 비주류 스포츠를 개척.

골프의 역사는 박세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피겨의 역사도 김연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박세리는 상류층의 레저 활동이었던 골프를 스포츠로 대중화시켰다. 김연아 역시 전용 빙상장 하나 없는 불모지였던 한국에 피겨스케이팅의 씨앗을 뿌렸다. 10년 전 온 국민이 버디와 보기를 공부했듯 요즘엔 플립, 러츠, 악셀을 배운다. 현재 '박세리 키드'들은 미국 LPGA 대회를 석권했고 '김연아 키드'들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중이다. 이에 대해 야구나 축구처럼 강력한 협회가 뒤에 있었다면 박세리와 김연아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내부 인맥에 휩쓸리거나 단체 행사에 끌려 다니느라 자유로운 도전이 어려웠을 거란 얘기다.

● 공통점 ② 헌신적인 '골프대디'와 '피겨맘'

한국의 교육열은 스포츠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박세리의 아버지 박준철 씨나 김연아의 어머니 박미희 씨는 두 선수들만큼이나 유명하다. 코치, 매니저, 운전기사까지 1인 다역(多役)을 마다하지 않으며 24시간을 딸들과 함께 했다. 박준철 씨는 박세리에게 아파트 15층 계단을 매일 5번씩 오르게 내리게 하며 혹독한 스윙연습을 매일 시켰고 박미희 씨도 김연아의 체력훈련만은 직접 시킬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딸들은 이런 아버지, 어머니에게 원망스런 말을 하기도 했지만 승리의 순간 그들이 가장 먼저 찾은 사람 역시 아버지, 어머니였다.

● 공통점 ③ 떨지 않는 강심장의 여인들.

박세리의 별명은 한 때 '터미네이터'였다. 함께 라운딩한 쟁쟁한 프로 선수들은 "박세리의 무표정과 담담함에 질리고 말았다"고 말했다. 아버지 박준철 씨는 대회 나갈 때마다 긴장하는 딸을 보고 한밤중에 공동묘지로 데리고 가 샷 훈련을 시키며 담력을 키워줬다고 한다. 누리꾼들이 붙인 김연아의 별명은 '대인배 김슨생'이다. 엉덩방아를 찧는 실수를 해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음 자세로 차분하게 넘어간다. 지난해 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부상으로 통증에 시달리던 김연아는 역전극을 펼치며 동메달을 땄다. 아픔을 참고 연기하는 동안에도, 시상대에서 올랐을 때에도 김연아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박세리와 김연아 공통점은 이들이 어떻게 '골프여왕''피겨여왕'의 자리에 올랐는지를 보여준다. 고된 훈련과 자기 절제를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반면, 두 선수의 차이점은 10년의 세월동안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키워드다.

● 차이점 ① 엄숙한 민족주의가 희석됐다.

박세리의 승리는 대한미국의 승리였고 박세리의 상금은 대한미국의 수입이었다. 아버지 박준철 씨는 "나라 전체가 어려운 때 세리가 모두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대한민국의 딸로서 더욱 선전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박세리가 US오픈에서 물 속에서 샷을 하는 장면은 당시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캠페인 광고'에 삽입되기도 했다. 배경음악은 '우리 가는 길 멀고 험해도… 끝내 이기리라'라는 운동권 가요 '상록수'로 외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묻어나는 광고였다. 박세리는 구국의 상징으로까지 비춰졌다.

김연아 선수에겐 이러한 민족주의를 자극할 요소가 더욱 많다. 서구 선수들이 독식했던 피겨스케이팅 무대에서 활약하는 유일한 한국인데다 '세기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상대는 일본의 아사다 마오다. 그러나 김 선수에겐 조국에 대한 부채의식이 전혀 없어 보인다. 경기장 안팎에서 또래 아사다 마오와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고 싶다고 말하지만 국위 선양의 뉘앙스는 전혀 없다.

이는 한국 사회가 세계화된 데 따른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갑작스럽게 금융시장 문호를 열어젖히면서 외환 위기가 초래되었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세계화에 눈을 떴다. 박세리 세대와 달리 김연아 세대는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레 체득했다.

● 차이점 ② 경기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

박세리는 LPGA 데뷔 첫해 4승을 올리며 '골프 여왕'에 등극했지만 이듬해 들쑥날쑥한 순위를 기록하자 성적 부진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런 야박한 평가에 박세리의 부담감이 얼마나 컸던지 "우승하면 당연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진한 건가요"라고 한 인터뷰에서 항변하기도 했다. 이후 박세리의 슬럼프에 대한 전문가들의 진단은 한결같았다. 우승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다 보니 초반 실수에 급격히 무너진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김연아는 경기 중 실수를 해도 금메달을 놓쳐도 웃는다.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편파 판정 논란에 대해서도 "생각보다 점수가 낮게 나온 면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김 선수는 "다른 선수들 신경 안 쓰고 나만의 플레이를 하는 것이 목표"라고 늘 강조해 왔다. 경기를 즐기는 김연아의 태도 때문에 김연아 자체가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었다. 김연아의 경기는 경쾌하다. 더구나 빼어난 노래나 춤 솜씨가 더해져 김연아는 스포테인먼트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 차이점 ③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다.

박세리가 서구 사회에 대한 도전자 이미지였다면 김연아는 동등한 경쟁자의 이미지다.

팔, 다리가 기다란 서구형 체형,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춰 한국인의 신체적, 언어적 콤플렉스를 날려 버렸다. 뿐만 아니라 피겨 스케이팅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나라에서 인기 있는 '고급 스포츠'이다. 복싱이나 축구처럼 '헝그리 정신'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다.

이는 한국의 경제적 성장과도 맞물리는 지점이다. 10년 전 IMF 한 마디에 벌벌 떨던 때와는 다르게 외국의 금융 위기에 대해 지난 위기 극복 경험을 바탕으로 훈수를 두기도 할 정도로 성장했다.

경제 위기에 영웅으로 떠오른 박세리, 김연아 선수. 닮은 듯 다르다. 어쩌면 그들은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우경임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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