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용산 역에 문을 연 복합 쇼핑몰 '스페이스9'.
서울 여의도 63빌딩의 1.6배, 삼성동 코엑스몰의 2.3배 연면적을 자랑하는 거대한 상권이었던 이 곳은 출범 당시 서태지를 광고모델로 내세우는 등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그리고 10개월도 되지 않아 '보기 좋게' 망했다. '거대한 랜드마크'라는 이유로 고객이 몰릴 것이라는 예상은 들어맞았다. 하지만 멋모르고 몰려든 고객들은 상인들에게 질려 발걸음을 끊었다.
이른바 '용팔이'라 불렸던 용산전자상가 출신 상인들은 물건을 싸게 파는 척 하면서 바가지를 씌우고, 매장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으며 살벌한 눈빛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MP3 플레이어를 사려고 하는데요…."라고 문의하는 고객에게 "돈 얼마 있는데요?"하고 묻기 일쑤였다.
상담 과정에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지갑을 열게 만든 뒤 돈을 낼 때가 되면 '충전기는 별매'라며 바가지를 씌우는 수법은 인터넷에 가격이 공개된 세상에서 더 이상 판매자들에게 돈을 벌어주지 못했다. 빈 점포가 점점 늘어나고 전체 매장의 60%가 비었다. 그러자 그들은 건물 관리 주체인 현대역사㈜측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머리띠를 둘렀다.
● '무한도전' 전문가
당시 스페이스9의 업태는 부동산 임대업이었다. 건물을 지어 점포를 분양하고 관리를 하는 게 현대역사의 주 업무였다. 영업은 분양자나 점포를 임대한 판매자가 '알아서' 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현대역사는 책임이 없었다. 하지만 현대역사는 상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구원투수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2005년 7월 15일은 현대백화점 상무였던 최동주(55) 신임 사장이 28만㎡ 규모의 쇼핑몰에 회사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도박'을 시작한 날이다. 그는 부임 직후부터 3000여명의 계약주, 6000여명의 업주를 모두 만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들과 만난 회수만 모두 6000회가 넘는다고 한다.
회생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는 독기 오른 계약주들로 인해 삿대질과 고성이 오가는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지만 석달간 대화가 계속 되면서 상인들 사이에서도 마음을 여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 사장도 마음을 열었다.
"만나보니 상인 한명 한명이 모두 사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성공하겠다고 경상도 시골을 떠나 지하 단칸방에 살면서 중국집을 운영해 번 돈을 모두 여기 투자한 계약주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나 살려 내라'고 악만 쓰던 사람들과 차분히 얘기를 나누며 속사정을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1978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그는 현대미포조선을 거쳐 1984~2005년 현대백화점에만 근무해온 유통 전문가. 그의 손을 거쳐 문을 연 현대백화점이 서울 압구정 본점, 무역센터점, 신촌점 등 13개 점포에 이른다.
평생 정형화된 모델이 없는 상태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그의 삶이었다. 그는 스페이스9을 살릴 방안을 찾기 위해 미국 유럽 일본 홍콩의 쇼핑 선진국을 돌아다니며 다시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도전에 나섰다.
▲동아닷컴 서중석 기자
● '스페이스9'에서 '아이파크몰'로
쇼핑 선진국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빠르게 늘어나던 대형복합 쇼핑몰. 몰(Mall)에서 쇼핑과 레저 문화생활을 동시에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이 점착 확산되고 있었다. 미국의 '몰 오브 아메리카'(Mall of America), 일본의 '캐널 시티'(Canal City), 홍콩의 '하버시티'(Harbor City)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 몰의 특징은 불황을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백화점에 가기 싫은 사람은 할인점에 가면 됐고, 전자제품을 사러 온 소비자가 옷을 샀다. 스페이스9은 KTX 용산역에 붙어 있기 때문에 열차 타러 온 고객에게 음식을 팔수도 있었다.
그 결과 스페이스9과 같은 규모의 공간에는 영화관, 마트, 백화점, 전자상가, 패션타운, 음식점 등이 모두 한 건물 안에서 해결되는 '몰링'(Malling)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몰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 그동안 백화점에서 쌓은 노하우를 활용해 빈 공간에 패션타운을 조성하는 한 편, 건물 한 쪽에 백화점도 새로 만들었다. 외국 사례를 참고해 국내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업종으로 몰을 빼곡히 채웠다.
1년 여간 사용해온 '스페이스9'이라는 '뜻 모를' 브랜드도 버리고 현대의 자존심인 '아이파크'를 내걸었다. "현대의 자존심을 내걸었으니 믿고 따라 달라"는, 계약주와 상인, 고객들에 대한 메시지였다.
또한 점포에서 음식 시켜먹고, 손님들에게 윽박지르고 담배도 피우던 상인들을 데려다가 백화점식 예절 교육을 받게 했다.
상인들은 "고객님~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며 낯간지러워 했고 대충 교육을 받고 점포에 내려와서는 예전에 하던 대로 했다. 그러나 최 사장은 '감찰반'을 운영해 매장에서 식사, 흡연, 자리에 앉아서 손님맞이하기 등 금지행위가 적발되거나 고객 불만이 접수되는 점포는 2, 3일씩 전기를 끊어 영업을 못하게 했다.
동시에 태스크포스(TF)를 조직해 몰 운영에 '스토리 텔링' 기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요즘 아이파크몰이 내세우는 테마는 '네버랜드'. 동화 피터팬에 나오는 동심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을 내세워 고객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
"제가 요즘 주로 읽는 책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이솝우화, 그림형제 동화 같은 것들이에요. 동화 속에서 길이 보이더라고요."
최사장과 계약주, 상인들의 노력은 실적으로 나타났다. 텅텅 비다 시피 했던 매장은 그가 부임한지 1년여가 지난 2006년 말 기준 평일 하루 7만 명, 주말 17만 명이 몰려드는 공간으로 바뀌었고, 지난해 말 내방객 수는 평일 27만 명, 주말 62만 명으로 증가했다.
매출 증가율 역시 크게 뛰어서 직영점 기준 2007년 매출 증가율은 42%, 지난해에는 34%에 달했다. 직영점과 임대점포 각종 수수료를 더할 경우 아이파크몰 전체 매출액은 지난해 1조5000억원을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 나의 무기는 '현대정신'
최 사장은 "나의 경쟁력은 현대"라고 단언한다.
'현대정신'은 긍정, 부정적 뉘앙스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저돌적으로 거침없이 도전하는 정신을 뜻함과 동시에 '앞뒤 안 가리고 무식하게 밀어 붙인다'는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최 사장은 "밀어붙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고 반문했다. "철저한 계산에 따른 정확한 예측이 없으면 밀어붙일 수 없다"는 것. 스페이스9이 아이파크몰로 탈바꿈하기까지의 과정에서도 그가 밀어붙인 표면의 액션보다 이면의 계산과 분석이 되레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경쟁력은 바로 현대 출신의 선후배들이다.
"도전에 봉착할 때마다 나는 지금도 '멘토'를 찾습니다. 멘토는 선배 중에도 있고 후배 중에도 있어요. (현대) 건설, (현대) 미포조선, (현대) 백화점, 아이파크몰까지 옮겨 오는 동안 현대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제가 목적지로 가는데 지름길 역할을 했습니다. 요즘 저의 멘토는 신입사원들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콘텐츠에요. 아이파크몰에 스토리텔링 기법을 적용하는데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주는 사람들이 바로 신입사원들이에요."
그는 "멘토는 내가 필요한 것, 없는 것을 채워주는 사람"이라면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고(故) 정주영 회장의 "해보기나 했어?"로 대표되는 '현대정신'의 신봉자답게 그는 최근의 경제위기의 극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로 "실천"을 꼽았다.
"어떤 학생이 산을 넘어서 집에 가야 아는데 귀신이 나오니 무서워서 못가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 선생님은 '귀신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학생이 '그래도 무섭다'고 하자 반복해서 또 말했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선생님이 '나랑 같이 가보자'며 학생 손을 잡고 그 산을 넘었습니다. 귀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학생은 그 뒤로 산길을 잘 다니게 됐죠."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는 대책 논의에만 그치지 말고 액션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약자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경제 위기 때 고통 받는 계층은 서민이기 때문에 경제위기에 대한 해법 역시 서민을 중심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 사장은 "요동치는 현상만 바라봤다면 아이파크몰은 이미 망했을 것"이라며 "폭풍우 밖의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고 항해를 했기 때문에 아이파크몰의 실적이 좋아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 경제 역시 폭풍우 넘어 고요한 바다를 보고 가면 얼마든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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