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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송평인]폭력시위, 씨도 안먹히는 영국

입력 | 2009-04-06 02:53:00



지난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취재차 영국 런던에 다녀왔다. 격렬했던 G20 반대시위와 경찰의 대응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1일 런던 금융중심지 시티의 시위 현장에서 ‘코랄링(corralling)’이라고 불리는 런던 경찰의 독특한 시위 진압 방식을 볼 수 있었다. 코랄은 가축우리란 뜻으로 코랄링은 가축우리에 몰아넣듯 시위대를 가두는 것을 말한다. 경찰은 시위대 200여 명을 시설물 파괴와 경찰폭행에 가담한 현행범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경찰은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이곳으로 통하는 통로를 봉쇄하고 시위대를 가뒀다. 시위대건 아니건 갇힌 사람이 봉쇄선을 벗어나려면 이름과 주소를 밝히고 사진촬영에 응해야 했다. 이를 거부한 사람은 봉쇄선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런 시위 진압 방식에 대해 비판도 많은 모양이다. 2001년 노동절 시위 때 옥스퍼드 서커스에서 물도 못 먹고 7시간 동안 갇혀 있던 시위대 2명이 소송을 제기했었다. 그러나 법원은 합법 판결을 내렸다.
경찰이나 법원이 폭력시위에 단호한 것은 유럽의 공통점이다. 이날 시위에서 런던 경찰은 폭력시위대에 가차 없이 곤봉을 휘둘렀다.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TV를 통해 생생히 방영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지 신문이 곤봉에 맞아 깨진 폭력시위대의 머리를 문제 삼지 않았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더 타임스 등 우파성향 언론은 소수 폭력에 의해 대다수 평화적 시위대의 대의가 훼손된 데 유감을 표시했다. 가디언 인디펜던트 등 좌파성향 언론도 경찰의 진압이 평화로운 시위대나 시위와 관계없는 시민의 자유권을 침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과도했다고 문제 삼았지만 폭력시위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지난해 한국에서 광우병 시위가 폭력으로 변질돼 가고 있을 때조차 폭력시위를 옹호하던 것과 같은 언론은 없었다.
3일 파리로 돌아오기 전 차링크로스 거리의 대형 서점 ‘포일스’에 들러 법률서적을 뒤져봤다. 스티브 포스터의 ‘인권과 시민 자유’란 책이 시위권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영국 법에 시위권이 없다고 법원은 일관되게 판결하고 있다. 시위권은 보통법상의 잔여적이고(residual) 불확실한(insecure) 권리다. 평화롭고 질서 있게 폭력을 유발하지 않고 교통을 방해하지 않을 때만 허용되며 경찰에게 넓은 재량이 주어진다.”
한국 집시법의 야간 옥외집회 금지 규정에 대해 위헌심판을 제청한 한 전직 판사는 제청이유서의 외국사례에서 영국에는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규정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보통법에는 그런 규정만이 아니라 어떤 규정도 없다.
프랑스에서 집시권은 헌법상의 권리가 아니다. 다만 ‘1881년 법’이 집시권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이 법이 원칙적으로 23시까지 집회를 허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옥내집회에 한한다는 내용은 빠뜨렸다. 옥외집회, 그 법의 표현에 따르면 공로(公路)상의 시위는 행정부가 허가부터 전적인 재량을 갖는다.
독일은 헌법으로 허가 없는 집회권을 인정하면서 옥외집회는 법률로 제한이 가능하게 했다. 독일 헌법은 우리 헌법의 참고서 같은 것이니까 그가 그런 제한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옥외집회의 특수성을 애써 무시했다.
사회는 일반인의 헌법소원보다 판사의 위헌심판제청에 훨씬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그만큼 사전에 철저히 조사하고 제청이유에 오류가 없도록 해야 한다. 잘 모르는 내용에는 침묵하거나 선배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 법적안정성을 추구하는 신중한 법관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행동이다.
송평인 파리 특파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