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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무대 위 소품마다 묵직한 메시지

입력 | 2009-04-06 02:53:00


리투아니아 출신 네크로슈스의 연극 ‘파우스트’ 시선집중

리투아니아의 연극연출가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가 세계 문화예술의 변방인 자국의 연극을 주목받게 한 비결은 무엇일까. 이는 연극에서 관객의 몫이었던 상상력의 공간을 새로운 ‘연극의 영토’로 개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작은 암시만으로도 작동하는 관객의 상상력에 제동을 걸고, 그 틈에 새로운 해석과 상징의 씨앗을 뿌린다. 작품 속에서 그 씨앗은 무성한 식물로 자라고 관객은 익숙했던 공간이 낯선 풍광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3∼5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네크로슈스의 ‘파우스트’에서도 이 연출의 본질을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익숙한 파우스트 1부만 다뤘다. 이성의 한계에 좌절한 노학자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고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다가 순진한 처녀 그레트헨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공연이 아니라 읽기 위한 작품으로 쓰여서 극적 내용은 대부분 주인공의 대사 속에 녹아있는 대신 언어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관객은 처음에 그 대사에 함몰돼 이 작품의 진가를 발견하지 못한다. 파우스트의 방황을 다룬 1막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러나 검둥개로 변신한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난 파우스트가 계약을 놓고 고뇌하는 2막이 되면 관객들은 네크로슈스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자라난 것을 느끼면서 대사보다 몸짓과 무대 위 오브제(사물)에 주목하게 된다. 2막에 나오는 거대한 하얀 뼈다귀가 검둥개로 변신한 메피스토펠레스의 먹잇감으로 파우스트를, 또 파우스트의 먹잇감으로 그레트헨을 상징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즈음에 나오는 밧줄은 이 작품의 백미다.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서를 대신해 가운데에 거대한 매듭이 있는 밧줄 앞에 선 파우스트. 피를 잉크로 삼아 서명을 하려는 순간 무대 양쪽의 마녀들이 팽팽하게 들고 있던 겹겹의 밧줄로 파동을 만들어낸다. 물질인 밧줄이 비물질적 형태로 전이되는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은 비로소 관객의 상상력을 백지로 삼아 비언어적 텍스트를 구축하는 네크로슈스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관객은 3막에서 괴테의 언어를 청각적으로 구축한 네크로슈스를 다시 만난다. 죽음을 선택하는 그레트헨을 놓고 ‘그녀는 심판받았다’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그녀는 구원받았노라’라는 신의 대사가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리투아니아어의 아름다움은 청아한 피아노 곡의 선율과 어울려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