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유행하던 농담 한 마디 : 미래를 알고 싶은 자, 시계를 조작할 일이다.
볼테르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진료실을 나선 후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두 번째 방문객이 찾아왔다. 은석범 검사였다.
"어서 오십시오. 3시 정각에 도착하셨군요. 차를 한 잔 마실 참이었는데,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오늘은 자스민을 즐길까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스트레스 해소에 특히 좋습니다."
노원장이 창가로 가서 직접 물을 끓이고 차를 타는 동안, 석범은 진료실을 둘러보았다. 말이 진료실이지, 20세기 어느 작가의 고즈넉한 집필실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보조 책상에는 낡은 턴테이블이 놓였고, 벽돌을 쌓아 만든 5단 책장에는 오백 여 권의 책이 빼곡하게 꽂혔다. 특이한 점은 모두 꺼풀을 씌워 지은이도 제목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석범이 다가가서 제일 윗단의 책 한 권을 뽑아 첫 장을 폈다. 였다. 그 옆의 책들을 차례차례 뽑아들었다. , , . 그리이스 신화와 문화 전반에 관한 책이 스무 권도 넘었다.
"왜 꺼풀을 씌우십니까?"
"간단한 보드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랄까요. 두뇌 훈련용입니다."
"두뇌 훈련을 위한 보드 게임이라고요?"
노원장이 자스민 차 두 잔을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석범도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책을 사서 완독할 때까진 꺼풀을 싸지 않습니다. 다 읽고 난 후에야 꺼풀을 씌워 꽂아둡니다. 매일 아침 출근하고 30분가량 책장 앞에 서서 꺼풀로 싼 책의 제목을 주욱 외우지요. 20세기 어느 시인은 세계의 명산 이름 외는 것으로 두뇌 훈련을 했다더군요. 이 책들이 내겐 명산입니다."
"꽂아둔 자리를 외우는 건가요?"
"영원히 첫 자릴 고수하진 않습니다. 책이 모이면 주제나 쓰임새에 따라 새 자리로 옮기지요. 소소한 이동은 거의 매일 있다시피 하고, 큰 이동 그러니까 전체의 25퍼센트 이상을 바꾸는 경우도 계절마다 한 차례 씩은 있습니다. 작은 이동이야 별 문제 없습니다만, 크게 이동한 후엔 책을 찾지 못해 애를 먹는답니다. 하기야 열에 아홉을 맞힌다면 그게 무슨 게임이겠습니까."
"읽고 있거나 이미 읽은 좋은 책을 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꺼풀로 싸는 건 아닙니까? 지혜의 말씀을 혼자만 간직하려고 말입니다."
"날카로우시군요. 이 정도 설명하면 대부분은, 어디 한 번 외워보세요, 이렇게 사소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쪽으로 갑니다. 그럼 저야 좋죠. 순서대로 제목을 열서너 개 대는 것으로 호감을 얻고 칭찬도 받습니다. 검사님은 이쪽 크고 높고 넓은 문 대신 더욱더 좁은 문으로 질문을 던진 두 번째 분이십니다."
석범은 첫 질문자를 알고 싶었지만,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도그맘 여사와 변주민 선수의 담당의셨죠?"
"네, 변주민 선수와 지금까지 세 번 상담치료를 했습니다. 단체 상담 한 번에 개인 상담 두 번이지요. 울분을 다스리고 푸는 능력이 꽤 많이 향상되어 오늘 날짜로 치료를 마칠 예정이었습니다."
"아, 그래서 변 선수가 오늘 오후 3시로 예약을 했던 것이로군요."
노원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3시라고요? 아닙니다. 변 선수는 오후 1시에 저와 만나기로 했죠. 도그맘 여사도 죽지 않았다면 같은 시간에 만나서 행복한 마무리를 했을 겁니다."
석범이 커플 칩을 통해 발견한 변주민의 스케줄을 떠올리며 다시 반문했다.
"원장님이 착각하신 것 아닌가요? 변 선수가 작성한 스케줄 파일에는 15시로 적혀 있었습니다."
갑자기 노원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으십니까?"
"고약한 버릇에 당하셨군요."
"버릇이라뇨?"
"변 선수는 시간을 기록할 때 꼭 두 시간씩을 더하더군요. 13시 약속은 15시, 15시 약속은 17시 이런 식으로 말이죠."
"두 시간을 더한다고요? 왜죠?"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남들보다 미래를 먼저 접하고 싶어서라나요. 가난과 절망을 딛고 하루라도 빨리 정상에 서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아마도 그런 엉뚱하면서도 귀여운 짓을 했나 봅니다."
"변 선수가 아내 대용 로봇에 관한 이야기도 하던가요?"
"아, 그건 확인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노원장이 잘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