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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포인트]최준영 씨- SADI 교수에서 보트제작자로

입력 | 2009-04-07 20:53:00


** 이 기사는 저널로그 기자 블로그에 등록된 글입니다 **

갑자기 순간이동을 통해 다른 시, 공간에 들어서는 듯했다.

번잡한 대학로 한 복판에 시침을 뚝 떼고 서 있는 30여년 된 낡은 주택. 지하 공방엔 미완성의 배들이 목재의 맨살을 드러내고 누운 채 허공에 떠있는 완성된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조로 된 2층의 사무실에 걸린 카약 두 척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날렵했다.

"죽은 나무에 정성을 들여 물고기로 만들었더니 다시 살아서 바다를 헤엄치는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멋지잖아요. 배를 만드는 일엔 그런 쾌감이 있어요."

최준영 씨(41)가 나지막하게 말할 때, 나는 은밀하게 꿈꾸는 연금술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반듯하게 켜놓은 죽은 목재에 비틀고 휘는 고통을 가해 생명을 불어넣어 바다로 돌려보내는 꿈.

어릴 때부터 그는 부모를 따라 해수욕장에 놀러가서도 물놀이 대신 근처 포구에서 배 구경을 즐겼다. 그에게 배는 물고기였다. 작은 배는 꽁치, 큰 배는 고래였다. 그 '물고기'를 만드는 일이 언젠가는 자신의 일이 될 거라고 어렴풋하게 예감했다. 그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약간의 우회로를 걸어야 했지만.

'물고기'를 만들 운명을 좇아서

삼성의 디자이너를 거쳐 이노디자인 그래픽 총괄이사, SADI(삼성 아트&디자인 인스티튜트) 교수로 일하던 그는 2005년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보트 빌더(Boat Builder)로 전향했다. 지금은 부모님이 살던 대학로 주택에 '올리버 보트'를 열고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며 주문 제작을 하고 있다. '항로 전환'이 궁금해 찾아 왔다고 하자 그는 "내가 방향을 확 틀었다고 할 수도 없는데…"하면서 당혹스러워 했다.

"전 어릴 때부터 종이에 디자인을 했고, 커서는 전자제품을 디자인했고, 지금은 주머니에 안 들어가는 물건을 디자인하는 차이 밖에 없어요. '업(業)'을 넓혀 왔을 뿐이지요."

어릴 적부터의 매혹을 잊지 못한 그는 97년 삼성에 입사할 때에도 "마흔 전엔 나와서 배를 만들어야지" 생각했다고 한다. 일찌감치 '터닝 포인트'를 점찍어둔 셈이다. 혼자서 꿈꾸다 제 풀에 시들해질 법도 하건만, 그에겐 준비를 결심하게 만든 만남이 있었다.

96년 그가 런던의 광고회사에서 잠깐 일할 때였다. 우연히 예순이 넘은 원로 파트너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네가 꿈꾸는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면 몇 살 때 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저도 모르게 '마흔'이라는 대답이 나왔는데, 그 분이 '그러면 10년 전부터 준비를 시작하라'고 조언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요. 열 살 이전을 빼고 생각해도 첫 직장을 갖기까지 15년 넘게 준비하는데 두 번째 인생을 준비 없이 맞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 할아버지를 만난 것이 제겐 행운이죠."

한국에 돌아와 직장에 다니면서도 혼자 계속 목선 제작 관련 자료를 모으고 습작을 거듭했다. 언제 쓰일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만들어둔 자료 앨범이 나중에 티켓이 됐다. 2005년 산업자원부가 모집한 '차세대 디자인 리더'에 그의 선박 디자인이 선정된 것. 주저 없이 사표를 내고 산자부의 지원을 받아 미국 워싱턴 주의 노스웨스트 보트 빌딩 스쿨 (School of Northwest wooden boat building)로 떠났다. 37살 때의 일이었다.

오래 기다려온 보이지 않는 손

오래 꿈꿔온 길에 마침내 들어섰을 땐 어떤 기분일까. 정작 그는 "별 감흥이 없다"고 한다.

"뭔가 결단할 때는 스스로 대단한 용기라도 낸 양 생각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아, 그때 내가 그냥 운이 좋았구나'하고 깨닫게 되잖아요. 마찬가지죠. 터닝 포인트 자체는 사건일 수 있지만 그 뒤에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운명 같은 길을 좇아가면서도 불안한 건 여전했다. 아내와 가족 모두 그의 결정을 지지했지만 괜히 혼자서 '내가 이래도 되나'하는 고민을 끌어안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저축해놓은 돈과 시간을 계산해가며 '이 정도 총알이면 얼마를 살겠구나' 하고 막막해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보이지 않는 손이 도와주는 듯한 느낌이 계속 들더라고 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2006년 10월 한국에 돌아와 "배를 만들자"는 생각 이외에 아무 계획 없이 작업장을 열었는데 해양레저시설, 마리나(요트계류장)가 속속 들어서고 2008년 경기도가 제1회 보트 쇼를 열었다. "준비운동 마치고 나니 갑자기 대회 일정이 잡히듯" 그가 일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계속 생겼다.

그의 주요 수입원은 카약 제작이지만 사실 카약은 그의 주 전공 분야가 아니다.

미국에서 배 만드는 일을 배울 때 저녁 시간이 아까워 마침 근처에 살던 전설적인 카약 빌더에게 카약 만드는 법을 배웠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카약을 계속 만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세일 보트, 파워 보트를 만들고 있는데, 우연한 방식으로 일이 풀렸다.

"작업장이 대학로에 있다보니까 카페인 줄 잘못 알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요. 그 중에 몇 명이 제가 만들어놓은 카약을 보고 감탄하더니 어떤 사람이 주문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한두 대씩 팔리다보니 어느새 수입원이 되어버렸어요."

카약 1대를 제대로 만들려면 1000만원이 넘는다. 직접 만들고 싶어 하는 애호가들을 보고 그는 200만원 중반대의 카약 키트를 개발했고 요즘 주말마다 약 8주의 일정으로 사람들에게 카약 제작을 가르친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말이 떠올랐다. 천복을 따라 살면 창세 때부터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던 길을 만나게 되고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따라다니며 문을 열어줄 거라던….

그에게 이 말을 들려주자 그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까지는 모르겠고 다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어요. 누군가 어떤 꿈을 갖고 있다면 그걸 계속 꿈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객관화해서 생각해보면 틈새가 있을 것이고, 그 틈새의 문을 열고 나가면 꿈이 자기 현실이 될 수 있어요."

틈새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렵다고?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 한두 개를 버리면 결정이 쉬워진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버리고 말고 할 대상이 아닌 부모님, 가족 이외에 중요한 것인 월급봉투를 버리고 난 뒤 그에게도 길이 열렸다. 그는 "소중한 것을 못 버리고 전부 다 그대로 가진 상태에서 배도 만들고 예전처럼 안정성도 추구하고,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가치 있는 '생물'로서의 배

그는 선박학교를 열기 위해 지방교육청 한 곳과 이야기를 진행 중이며 부지 확보까지 마쳐놓았다고 한다. 예정대로라면 내년 9월 선박학교의 문을 연다.

배를 잘 만들기 위해 필요한 건 손재주일까. 그가 고개를 저으며 "큰 선을 보는 눈"이라고 단언했다.

"전체를 보고 선을 그릴 수 있는 눈이 가장 중요해요. 선을 그리는 눈을 키우려면 논리력이 있어야 해요. 엉뚱할지 몰라도 저는 제자들에게 논리적으로 말하는 훈련을 시킵니다. 논리적으로 말을 하지 못하면 논리적 사고가 안 되고, 논리적 사고가 어려우면 선을 그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해내는 게 불가능하죠. 논리적인 사고와 그의 구현이 보트 빌더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그는 "고급 목조 연안여객선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면서 "가치 있는 '생물'로서의 배를 만들고 사람이 '짐'으로 배를 타는 게 아니라 배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에게도 잘 묻지 않던 질문을 그에게 뜬금없이 던져보았다. 요즘 행복하신가요?

"글쎄요. 행복이 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어요. 다만, 날마다 그날 하다 만 작업을 꿈꾸면서 잠자리에 들고, 목재를 이렇게 잘라 저렇게 붙이고 하는 작업을 마저 하고 싶어서 눈이 떠져요. 그걸 행복이라고 부른다면 전 행복한 것 같네요."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