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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환상세계로 클릭!

입력 | 2009-04-08 02:58:00


《무엇이든 빌려주는 사이트에서 ‘고독’을 빌리는 남자, 로봇 도우미 사이트에서 ‘사이보그’를 대여하는 여자, 소원을 이뤄주는 빵을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사람들….

판타지나 SF소설의 줄거리가 아니다.

한국 본격 문학작품에서도 최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 장면들의 공통점은 인터넷이 환상세계로의 이행로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한국 소설 속에 등장한 것은 1990년대 후반 PC통신 시절. 이때만 해도 소설 속의 온라인 공간은 채팅이나 카페, 온라인 게임의 장으로 묘사됐고 관심사는 소외와 고립, 소통의 문제였다. 온라인게임 중독자를 다룬 소설가 김영하 씨의 ‘삼국지란 이름의 천국’이 대표적이다.

○ 인터넷의 소외-소통 문제 다루던 과거와 달라져

최근 소설 속에서 인터넷은 좀 더 자유분방한 환상세계로 안내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 소설가 김경욱 씨의 단편 ‘고독을 빌려드립니다’에서 홈쇼핑 고객관리부 팀장인 주인공은 기러기 아빠인 친구의 권유로 무엇이든 빌려주는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해 ‘휴식 같은 고독’을 빌린다. 매일 밤 울어대는 아이 때문에 지친 가장, 기러기 아빠의 고독 등 일상성에 기반을 두고 있던 소설은 이 사이트에 의지하던 친구가 실종되면서 비일상적으로 변모한다. 계간 창비의 최근호에 수록된 서유미 작가의 단편 ‘저건 사람도 아니다’도 마찬가지. 육아와 업무의 병행에 지친 워킹 맘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주인공이 ‘로봇 도우미의 세계’란 웹사이트를 발견하며 반전을 이룬다.

이런 설정들은 소설가 윤이형 씨의 단편 ‘두드리는 고양이들’이나 구병모 씨의 장편 ‘위저드 베이커리’, 소설가 박화영 씨의 단편 ‘악몽 조각가와 거구의 제자 그리고 몽마’ 등에서도 나타난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고양이나 소원 또는 저주를 이뤄주는 빵, 악몽 조각 등의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소재들이 모두 웹사이트나 블로그를 통해 등장하거나 판매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 “온라인 공간, 작품 속 판타지 설정에 설득력”

이처럼 소설 속 인터넷이 황당무계한 세계로 가는 통로로 등장하는 것은 웹 공간에 대한 인식 변화와 연관된다는 분석이다. 문학평론가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는 “초기의 인터넷이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 새로운 공간으로 인식됐다면 이제는 일상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 됐다”며 “가상공간이 현실을 압도하거나 지배하는 최근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온라인 쇼핑사이트, 홈페이지, 게시판 등 생활과 밀접한 온라인 공간에서 소설과 유사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구 작가는 “소원이나 저주를 들어주는 빵을 파는 ‘위저드 베이커리 닷컴’은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 데스노트처럼 저주와 관련된 상품이 인기를 끌며 판매되는 걸 보고 착안했다”며 “온라인 공간은 소설 속의 판타지적인 설정들이 쉽게 개연성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한국 문학의 환상성이 강해지는 현상과도 떼놓을 수 없다. 문학평론가 이광호 서울예대 교수는 “한국 소설 속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사라지거나 가상이 실제화되는 경향은 인터넷 체험이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사이버 체험에 영향을 받은 소설의 ‘환상미학’은 계속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