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저는 지금 연쇄살인사건을 수사 중입니다. 변주민의 사생활을 조사할 권리가 있음을 알려 드렸을 텐데요."
"보안청으로부터 협조요청서를 받긴 했습니다. 특별시연합법에 의거하여 검사님의 요구가 위법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러나 법의 차원이 아니라 분노를 다루는 의사의 윤리적 차원에서, 비밀 유지를 요청한 도그맘 여사와 변주민 선수에 관해서는 어떤 질문도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환자와의 상담 파일을 외부에 공개한 적이 없습니다. 보안청이라고 해도."
"공무집행방해로 처벌받을 수도 있습니다."
"벌을 내리면 달게 받겠습니다."
"원장님! 이런 말도 안 되는 실랑이는 정말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담당의는 상담 내용을 녹화하여 30년 간 보관해야 합니다. 그 파일을 보내주셨다면 제가 여기 올 이유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변주민 선수와 상담한 파일을 보내지 않을 겁니다."
"보안청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해커들을 걱정하는 거라면 염려놓으십시오. 이중삼중으로 철저하게 보안조처 하겠습니다."
노원장은 석범의 간청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자스민 차를 권하던 친절함과 따스함은 사라지고 뿔테 안경 속 눈동자에는 날카로움이 가득했다.
뭔가 있구나.
석범은 직감했다. 아무리 고집불통 의사라도 병원 문을 닫게 하거나 감옥에 처넣겠다고 하면 타협점을 먼저 밝혀 살아날 구멍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변주민에 관한 파일을 넘기지 않는 것은, 그 많은 손해를 감내하고서라도 지켜야할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자연인 그룹과 연결되어 있는가? 혹시 비밀 조직원?
"보안청 직원들은 언제나 당당하군요. 잘못이나 오류 따윈 단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몰아붙입니다. 안전하다고 했습니까? 파일이든 진술서든 전혀 새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거죠?"
석범은 맞대응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노원장이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 검사님은 이런 생각을 하시겠지요. '적어도 나는 아니다. 난 끝까지 앵거 클리닉의 상담 파일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겠다.' 그 자신만만함이 더 큰 화를 부르는 법입니다. 지금이 어떤 세상입니까. 지구라는 행성에서 '단독자'로 살아남을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네트워크가 가만두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물론 은 검사님은 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이라도 던지실 겁니다. 믿지요, 믿습니다. 그러나 네크워크란 놈은 피도 눈물도 없지요. 작은 링크 하나가 검사님의 자신감을 단숨에 쪽 빨아 삼킬 겁니다."
"아닙니다. 저는……."
석범의 목소리가 가늘고 빨라진 만큼 노원장의 가위질도 더욱 활발했다.
"도그맘 여사와 변주민 선수의 때 이른 죽음은 나도 무척 가슴 아픕니다. 그러나 고인의 행적이 세상에 알려져 고인을 두 번 죽이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입니다."
"원장님 심정을 짐작은 하겠습니다."
"아니! 은 검사는 전혀 짐작 못합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겨짚어 유도하는 것을 보니 아직 대문도 두드리기 전이로군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알아듣기 쉽게 속 시원히 말씀이라도 좀 해주십시오."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똑바로 물으십시오. 방송국과 부엉이 빌딩 테러에 내가 얼마나 개입했는지 궁금한 거 아닙니까? 더 상상의 나래를 펴면, 이 연쇄살인도 테러의 일환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궁리 중이죠?"
"저는 아닙니다만, 그런 의심을 품은 형사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가장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한 이는 앨리스였고, 창수와 병식도 앵거 클리닉에서 구린내가 진동한다며 맞장구를 쳤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나는 아닙니다. 난 그저 '자연인을 아끼는 사람들'에 이름만 올려두었을 뿐입니다. 조사해보세요."
대체 누가 이 따위 앞뒤가 꽉 막힌 병원을 보안청 협력 병원으로 지정한 거야? 협력? 웃기고 있네. 방해도 이런 방해가 없어.
석범은 줄줄이 요동치는 문장들을 겨우 찍어 눌렀다.
"알겠습니다. 미리 살펴보니 깨끗하시더군요. 곧 다시 오겠습니다."
"변주민 환자나 도그맘 여사 때문이라면 오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나는 이미 말씀을 다 드렸습니다."
"그래도 오겠습니다. 그때도 맛있는 차 한 잔 주십시오. 이왕이면 숙면을 유도하는 차로 부탁합니다. 부쩍 자주 악몽을 꾸거든요."
석범은 어색한 악수를 나눈 후 진료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