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극상’ 참관 김윤철 교수가 본 올해의 수상자 크리스티앙 루파
《5일 폴란드 서남부의 연극도시 브로츠와프에서 제13회 유럽연극상 시상식이 열렸다. 아리안 므누슈킨, 피터 브룩, 피나 바우슈, 로버트 윌슨, 레프 도진, 해럴드 핀터, 로베르 르파주 등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만 봐도 이 상이 갖는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올해의 수상자는 폴란드의 연출가인 크리스티앙 루파(66·사진). 키가 2m도 넘어 보이는 이 깡마른 거인은 올해의 수상이 때늦다 싶을 만큼 오래전부터 유럽 연극의 선봉에 서 왔던 독보적 존재다. 올해는 마침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를 기념해 유네스코가 정한 ‘그로토프스키의 해’여서 그의 수상이 더 돋보였다.》
○ 냉소-절망 시대흐름에 맞서 예술연극 지향
현대의 유럽 연극이 언어와 미학과 가치를 부정하는 사치의 향락에 심히 중독됐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올 유럽연극상의 새 개념연극 부문 수상자 5명 가운데 한 사람인 아르헨티나·스페인의 연출가 로드리고 가르시아를 보면 이 병든 흐름의 실체가 보인다. 세 편의 공연에서 그는 살아 있는 동물을 학대했고 어린아이들이 보는 가운데 벌거벗은 남녀의 영혼 없는 몸뚱이들로 하여금 거의 실연에 가깝게 성행위를 수행하도록 했으며 배우들을 진흙탕 속에 패대기치면서 인간의 몸을, 생명의 존엄성을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참혹하게 학대했다. 무엇 때문에 관객들의 분노를 이렇게 격발시키는가. 위악으로 위선하는 그의 연극행위는 정말로, 참으로, 진짜로 역겹다. 가르시아와 함께 이 상을 공동 수상한 이탈리아의 델보노 피포, 벨기에의 기 카르시에, 헝가리의 아파드 실링, 프랑스의 프랑수아 탕기 등은 포스트모던한 혼종의 형식 속에 종말론 시대의 고뇌에 접근하고 있지만 이들 역시 삶에 대해서는 지극히 냉소적이거나 절망적일 뿐이다.
○ 길고 느리고 조용한 철학적 미학 담아
반면 루파는 시대의 흐름인 부정의 미학을 부정하며 새로운 차원의 연극성을 끈기 있게 모색한다. 도스토옙스키, 뮤질, 베르나르에 이르는 고전적 소설들을 토대로 철학과 문학이 있는 예술연극을 지향한다. 유럽연극상 수상 기념으로 그는 세 편을 무대에 올렸다. 이 가운데 아직 연습 중인 작품인 ‘페르소나’에서 그는 메릴린 먼로의 죽음을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연계시키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서사적 틀을 차용했다. 마지막에 먼로가 정신병원의 하얀 병실에서 예수의 십자가형을 배경으로 화장되는 장면은 참으로 아름답고 충격적이며 감동적이었다. 루파가 극본, 무대디자인, 연출을 도맡아 제작한 장장 8시간짜리 연극 ‘팩토리 2’는 최근 우리를 열광시키고 있는 앤디 워홀의 작업실 ‘실버 팩토리’와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즉흥환상곡이었다. 완전한 자유를 위해 삶의 지루함을 오히려 사랑하며 무책임, 무작위, 무개입으로 일관한 워홀의 삶과 죽음이 주변인들과의 충만한 교감 속에서 잔잔하고 깊고 진하게 펼쳐진다.
루파의 연극은 대체로 길고 느리고 조용하다. 반현대적이다. 그러나 그 긺과 느림과 고요함은 비효율도 아니고 무능은 더더욱 아니다. 사유로 충만한 철학적 미학이다. 배우들은 줄곧 무대에서 생각하면서 서로 충돌하고 어긋나고 화합하는데 그 심리적 정신적 상호작용이야말로 루파 연극미학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의 연극은 배우의 존재감을 거의 절대화한다. 폭력과 외설, 무감각과 냉소주의에 빠져 바닥없이 추락하는 현대의 유럽 연극에서 루파는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가 되고 있다.
김윤철 국제연극평론가협회장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