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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경제개발의 길목에서 ⑨

입력 | 2009-04-10 02:55:00

1971년 수출공단을 시찰하는 남덕우 재무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 당시 수출 확대에 나선 기업들은 자금 부족을 호소하며 긴축정책을 완화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남 장관은 만성적 자금난은 물가 상승에서 비롯된다며 긴축정책을 통한 인플레이션 수습에 안간힘을 쏟았다.


⑨ 긴축정책의 효과

나는 재무부 장관 취임 이후 긴축정책으로 인플레이션를 수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거센 반발에 부닥쳤고 특히 수출업계의 비명이 드높았다.

대통령 임석하에 수출확대회의가 열리면 당시의 무역협회장이었던 이활 씨는 재무부의 긴축정책 때문에 수출이 안 된다고 소리 높여 재무부를 비난했다. 그래서 나는 이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마치 검사 앞에 선 피고인이 된 기분이었다. 회의석상에서 인플레이션의 원인과 해법을 장황하게 강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대통령이 무성의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항상 하던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수출업계의 만성적 자금난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면, 물가가 상승하면 같은 물량을 생산해 수출하는 데에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에 수출업계가 자금 부족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수출산업의 물량 증가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팽창한 통화량을 더 늘리면 물가가 더 올라가서 더욱 자금 부족을 느끼게 돼 ‘통화량 증가→물가 상승→자금 부족→통화량 증가’의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긴축정책을 시행하는 것이니 조금만 참아 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은 수출확대회의에서 상공부가 수출 애로 사항을 보고하면 그 자리에서 대책을 지시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날은 아무 말 없이 일어섰다. 그러더니 내 옆을 지나가다가 청와대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청와대로 올라가면 대통령은 언제나 나에게 담배부터 권한다. 지금은 안 피우지만 그 당시에는 줄담배를 피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소파에 앉더니 그는 두 손으로 빨래 짜는 시늉을 하며 “남 장관, 쥐어짜지만 말고 업계의 사정 좀 돌봐줘” 하는 것이었다.

그전에도 긴축정책이 어렵지만 왜 해야 하는지 보고한 적이 있어서 또다시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알겠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재무부에 돌아와서 이재국장에게 자금 추가공급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실무자들은 잔꾀를 부려 약간의 추가자금 외에 어차피 나가게 돼 있는 자금을 마치 추가 공급인 양 보도자료를 작성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없이 넘어갔다.

재무부는 언제나 보수적이고 무슨 요구가 들어오면 우선 “노(No)”부터 해놓고 보는 부서다. 이것은 예산당국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으면 재정금융의 마지노선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무부는 인기가 없는 부서이고 정부 내에서나 국회에서나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해마다 수출 유공자를 표창하는데 재무부 직원이 포상에 포함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재무부와 기획원은 경제 정책의 중심이었고 엘리트 공무원들이 모여 있었다. 나와 함께 일하던 부하들이 대부분 장관 또는 총리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고 나는 지금도 흐뭇해한다.

긴축정책과 인플레이션 수습을 위해 안간힘을 다했는데 과연 나는 얼마나 긴축을 했을까? 몇 가지 경제 지표를 되돌아본다. 개략적으로 내 임기에 해당하는 1970∼1974년의 총통화 평균 증가율은 28.5%인데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게 무슨 긴축이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임기 전 5년 평균인 61.9%에 비하면 상당한 긴축이고, 내 임기 후 5년 평균인 32.2%에 비하더라도 긴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수습에는 실패했다. 도매물가 상승률은 내 임기 전 5년 평균이 8%인데 내 5년 평균은 16.1%로 2배나 더 높았다. 그러나 이것은 1973, 1974년의 중동발(發) 석유파동으로 1974년 한 해의 물가 상승률이 42.1%나 됐기 때문이다. 내 임기 후 5년 평균 상승률도 15.6%였고 1982년에 가서야 비로소 도매물가 상승률이 4.7%로 하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