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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DNA 분석… 토종자원 지키고 개량해요”

입력 | 2009-04-15 03:00:00


‘식물계의 국과수’ 수원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유전자원부를 아십니까

2007년 4월 4일 새벽 충남 공주시 계룡산국립공원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냥 소나무가 아니다. 100년 된 자연산 반송(盤松)이었다. 가지가 우산 모양처럼 퍼져가는 반송은 최고급 조경수 중 하나다. 사라진 소나무는 시가 3억 원 상당.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공주지역의 한 분재원을 의심했다. 도난당한 것과 비슷한 소나무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몇 달 동안 애를 태우던 경찰은 같은 해 9월 분재업자를 긴급체포했다. 이 업자는 혐의를 부인했다. 경찰은 유전자(DNA) 감식 서류를 그에게 내보였다. 서류에는 소나무 뿌리조각의 유전자와 분재원에 있던 나무의 유전자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살인·성폭행사건의 범인뿐 아니라 나무도 유전자 대조를 한다는 사실이 이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일반에 알려졌다.

○ 1만5925점 초저온 상태 보관

당시 소나무의 유전자 감식을 한 곳이 바로 경기 수원시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유전자원부다. 이 일로 식물계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라는 별명이 붙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유전자 분석 기술은 비슷하다. 다만 데이터를 분석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난다. 식물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과 경험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것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천연기념물 103호인 속리산 정이품송의 후계목 58본을 선보였다. 부계에 의한 나무 혈통 보존은 세계에서 처음이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친자 확인’까지 이뤄졌다. 이때 공개된 정이품송 후계목은 최근 독립기념관과 남산 등지에 심어졌다.

산림유전자원부는 소나무 등 다양한 식물자원을 보전하기 위해 전국 2683ha의 포지에 유전자원보존원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수원의 ‘클론보존원’에는 금강송 등 전국 각지에서 채집한 우수 품종의 소나무 250그루가 자라고 있다. 대부분 수령 40년을 넘겨 높이만 25m에 이른다. 또 유전자은행(Gene Bank)에는 경제성이 높은 생물 유전자원 1007종 1만5925점을 영하 18도 또는 영하 196도의 초저온 상태로 보관하고 있다.

○ “우리 나무 좀 살려주세요”

올해 초 산림유전자원부에는 한 통의 공문이 도착했다. 강원 강릉시 연곡면사무소가 보낸 공문에는 “삼산리소나무의 후계목을 찾아달라”는 마을 주민들의 간곡한 요청이 담겨 있었다. 수령이 450년에 달한 삼산리소나무는 높이 21m, 둘레 3.85m로 198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그러나 3년 전부터 상태가 악화되다가 지난해 8월 고사 판정을 받았다. 안타까워하던 주민들은 산림유전자원부 보도를 접하고 “혹시 자손이 있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연구원들이 3개월 가까이 현지조사와 분석을 벌였지만 최근 “후계목을 찾을 수 없다”는 회신을 보냈다. 이에 앞서 신목(神木)으로 불리던 서울 통의동 백송(白松, 천연기념물 4호)도 1990년 낙뢰를 맞아 고사했다. 백송 천연기념수는 지금까지 전국에 8그루가 있었으나 그동안 3그루가 죽고 현재 5그루만 남아있는 상태다.

○ 토종 유전자원 지켜야

‘미스킴라일락’이라는 품종이 있다. 1947년 북한산에서 미국인 미더 교수가 종자를 채집해 미국에서 개량한 것이다. 지금은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차지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역수입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특산 수종인 구상나무도 1920년 영국인 식물학자인 윌슨 박사가 신품종으로 발표했다. 이후 미국, 유럽 등지에 널리 전파돼 값비싼 정원수와 크리스마스 트리용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모두 한국 토종 생물자원이 국외로 유출된 대표적 사례들이다.

유전자원보존원 설립 및 운영의 가장 큰 이유는 토종 유전자원의 유출을 막는 것이다. 해외에 퍼진 한국 생물자원의 종류와 과정을 분석하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실제로 벚꽃축제의 주인공인 왕벚나무 역시 제주가 자생지였고 일본이 개량해 보급한 사실이 10여 년 전 산림유전자원부의 유전자 분석을 통해 확인됐다.

특히 2009년부터 국제식물신품종보호협약(UPOV)이 발효되면서 신품종에 대한 지적 재산권이 인정돼 생물 유전자원을 둘러싼 각국의 ‘전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산림유전자원부 이갑연 유전자원과장은 “미스킴라일락이나 구상나무를 떠올리면 우리 것을 지키지 못한 씁쓸함과 책임감이 느껴진다”며 “미래 생명산업의 수요변화에 대응하려면 산림유전자원의 보존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