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찢긴 엄마 ‘눈물의 8년’
‘많이 먹고 커야’ 강박 시달려
가해자는 풀려나 거리 활보
“범죄자 공개 주저해선 안돼”
충청도의 한 초등학교 6학년인 A 양(12)은 몇 년 전부터 겨울만 되면 공기밥을 두 그릇씩 먹어 왔다. 피자 한 판을 혼자서 뚝딱 해치우는가 하면 밤에도 뭔가를 먹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잤다. 평소에는 밝고 쾌활한 모습이었지만 유독 겨울만 되면 걸신들린 듯 폭식을 했다.
A 양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장염으로 세 번이나 병원에 입원했다. A 양은 또 평범한 어린이답지 않게 어머니 B 씨(40)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사둔 스쿠알렌이나 홍삼 같은 건강식품을 즐겨 먹었다. 어머니는 딸이 키가 크려는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겨울 어머니는 장염의 원인이 폭식이었고, 또 폭식은 성범죄 피해 후유증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8년 전 겨울, 딸이 이웃집에 놀러갔다가 성추행을 당한 뒤 딸은 겨울만 되면 폭식을 한 것이다. 담당 의사는 “성폭력 피해 아동들이 트라우마를 겪으며 ‘많이 먹고 빨리 커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폭식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 말에 어머니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손녀는 건강식품을 참 좋아한다”고 말할 때마다 B 씨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다.
당시 어머니는 명랑하고 착한 아이가 갑자기 물건을 부수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고 침울해 보여 성추행을 당한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가해자는 무혐의 처리됐다. 성범죄의 경우 다른 증거가 없고 피해자 진술에만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법원은 네 살짜리 아이의 진술이 오락가락해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가해자는 청소년 성범죄자 신상정보 열람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B 씨는 본보가 16일자에 공개한 청소년 성범죄자 신상정보 열람 대상자 147명의 주소지, 나이, 범행 장소 등을 보았다. 딸 생각에 다시 한번 가슴이 미어진 B 씨는 17일 이렇게 말했다.
“성폭행이나 성추행은 대부분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리됩니다. 유죄 판결을 받아도 항소심에 가면 70%는 집행유예로 풀려나요. 아동 성폭력전담센터에 매년 600∼700명이 아동 성범죄 피해 상담을 받으러 오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성범죄자 열람 대상자는 너무 적은 편입니다.”
본보의 기사를 계기로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 신상의 인터넷 공개제도 도입을 놓고 찬반 논란이 다시 가열되고 있다. 찬반양론에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지만 가슴이 아픈 피해자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2006년 서울 용산초등학교 허모 양 성추행 살해사건을 저지른 범인은 불과 몇 달 전 여자 어린아이를 성추행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람이었어요. 이 사실만 공개됐더라면 허 양은 지금 14세 사춘기 여중생이 되었을 텐데요.” B 씨의 목소리가 유난히 떨렸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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