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파동
석유파동 와중에 부총리 임명
저성장-물가고-수지악화 3중고
성장기조 유지로 위기 정면돌파
1973, 74년은 석유파동으로 한국 경제가 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던 시기다. 석유가격이 일시에 4배나 오른 것이다. 당시 제조업의 에너지 비용이 제조 원가의 약 36%를 차지하게 됐고 제조업은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됐다. 물가 상승도 불가피하게 됐다.
정부의 1차적인 대응은 12월 4일에 태완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발표한 종합물가대책, 1974년 1월 14일의 ‘국민생활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였는데 기본 골자는 석유류 및 관련제품의 대폭적 가격인상에 따른 물가 파급을 가격 통제로 최대한 억제하는 동시에 서민생활에 주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금융·세제상의 구제조치를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안정화 조치의 기본적인 약점은 유가파동이 물가구조의 전면적 재편성을 요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 사정 때문에 가격조정을 단편적으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대폭적 가격조정 후에도 인상요인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에 더해 통화 인플레이션을 행정통제로 억제하는 일이 계속됐다.
1974년 9월 태 부총리가 과로로 쓰러졌다. 9월 18일 김종필 국무총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부총리로 임명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만 학교로 돌아갔으면 했는데 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을 잘못 고르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4년 11개월 만에 재무부를 떠나게 됐는데 길고도 짧은 기간이었다. 후임자인 김용환 장관이 고맙게도 나의 임기에 해당하는 ‘재무행정 5년사’라는 책자를 간행해 줬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실로 다사다난한 세월이었다는 감회에 젖게 되었다.
기획원으로 자리를 옮기자 경제운영의 기본 방향에 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저성장, 물가고, 국제수지 악화의 3중고(苦)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물가안정에 우선순위를 두면 무자비하게 통화긴축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미 벌여놓은 중화학공업 건설은 어떻게 되고, 대량실업과 그에 따르는 정치사회적 불안정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대통령이 과연 그런 정책방향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밀어줄 것인가. 어차피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펴 봤자 고도의 물가상승은 불가피하고, 국제수지가 악화되는 것도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성장기조만이라도 유지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일본의 대응방향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역시 긴축과 안정화가 강조되고 있었다. 하기야 한국이 일본과 같은 경제 기반과 깊이가 있었다면 우리도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택하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겨우 발전의 시동이 걸린 초기 단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이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견뎌낼 것 같지도 않았다.
어느 날 나는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생각을 솔직히 고백하고 안정화 일변도의 정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런 내 시각이 12·7조치에 반영됐는데 조치의 내용을 보면 성장, 물가, 국제수지 등 3면의 대책이 고루 나와 있지만 결국 성장기조를 유지한다는 의미의 안정화 정책이었다.
한편 중화학공업 계획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기도 했다. 포항제철의 제2기 확장공사를 뒤로 미루고 새마을 주택사업을 축소하는 한편 미착수 사업을 연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진행 중인 사업들은 적극적으로 완공을 서두르고 외자유치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다행히 비가 오면 개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그 후 1976, 77년 세계 경제가 호황으로 돌아서자 우리 경제는 고도성장(1976년 경제성장률 14.3%, 1977년 10.7%, 1978년 11.0%)을 이뤘다. 1977년에는 중화학 제품의 수출이 증가하고 중동 진출이 가세해 1960년 이후 17년 만에 국제수지가 12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월례경제동향 보고회의에서 이 사실을 보고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무척 기뻐했고 “남 부총리 영도하에 경제각료들이 수고한 결과”라고 치하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위험수위에 달했으니 결국 성장, 국제수지, 물가의 세 마리 토끼 중 두 마리를 잡고 한 마리는 거의 죽이고 만 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