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강제통합에 반대하면서 생긴 한 커뮤니티
정보통신부가 2004년 1월 1일 부로 시행한 '010 통합 식별번호'체제가 어느새 5년이 넘어섰다.
현재 010 번호 이용자는 70% 정도. 지난해 3G가입자가 10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빠른 3G 전환속도를 고려하면 2009년 하반기에 010 번호 이용자 수는 전체의 80%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당초 80%라는 수치는 정부가 011, 016, 019 등 여타 번호의 강제 통합을 위한 기준치로 제시한 숫자다. 때문에 올 초만 해도 정통부를 이어받은 방송통신위원회가 어떤 형태로든 010 번호 통합을 포함한 번호자원 정책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얘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방통위의 입장은 '신중모드'다. 강제 통합을 추진할 경우 사회적 파장이 너무 크고 다른 정책에 비해 그리 긴박한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에서 '번호 통합이 내년으로 연기될 지도 모른다'고 보도해도 방통위 측은 "논의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며 대응을 꺼리고 있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010 번호 통합 논의가 올해를 넘기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흐지부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온다.
● 사라진 통합 명분?
010은 과거 각 이동통신사마다 부여되었던 고유 식별번호 011, 016, 017, 018, 019를 통합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번호다. 번호자원의 효율적 사용이나 사업자의 중복 시스템 운영에 따른 부담 절감, 그리고 이용자간 식별번호를 누르지 않아도 되는 편리성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됐지만, 당시 지배적 사업자인 SKT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이란 뒷말도 낳았다.
현재 011등 구 번호의 010 으로의 매핑(번호이동) 계획까지도 완벽하게 수립된 상황이다. 방통위가 결정만 하면 4000만개에 달하는 핸드폰 번호가 순식간에 010-OOOO-OOOO으로 통합된다. 010이 동일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8자리 전화가 되는 셈이다.
문제는 구 번호 사용자들의 거센 심리적 반발이다. 010을 이용하지 않는 800여만 명의 사용자들 중 상당수는 강제 통합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현재 3G 개통을 위해서는 010으로 의무변경을 해야 하지만 음성통화로 버티는 한이 있어서라도 011번호를 지키겠다는 주장이다.
이들 구 번호 사용자들은 "011을 사용한지 10년이 넘었다"며 "개인에게 판매된 번호를 국가가 강제로 변환하는 것은 사유재산 침해가 아니냐"며 강하게 반발해 왔다. 실제 논의가 본격화된 지난해에는 누리꾼들이 '010 강제통합 반대' 사이트를 개설하고 집단소송까지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단소송의 근거가 됐던 번호의 사유재산론은 근거가 빈약하다. 전화번호는 한정된 공공재에 속하는 국가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실제 과거 집전화의 한자리 국번이 두 자리, 세 자리로 변경될 때도 체신부의 공고로 한 번에 정리됐다. 사유재산처럼 보일지라도 전화번호는 국가로부터 일정한 대역의 전화번호를 불하받아 쓰는 임시 이용권이므로 국가가 강제로 번호 통합에 나설 경우 이에 반대할 명분이 거의 없다는 것이 통상적인 법리 해석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기됐다. 휴대전화 번호를 인격권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법무법인 동인의 김주범 변호사는 "이제 휴대전화 번호는 재산권 측면보다 인격적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면서 "전화번호와 나는 어떤 일체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번호에 대해 (국가가) 일방적 교체를 명령하는 것은 이름을 바꾸라는 것과 같이 불쾌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 휴대전화 번호는 개인의 인격에 직결
김 변호사는 이와 유사한 사례로 1996년 '류(柳)'씨 성에 두음법칙을 적용해 모두 '유'씨로 기재하라고 정한 대법원의 가족관계법 예규를 꼽았다.
이에 대해 10년 내리 개인의 소중한 성(姓)씨를 국가가 마음대로 고쳤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결국 2006년 대법원은 헌법상 기본권인 인격권 또는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 예규를 개정했다. 이로 인해 한자로 된 성을 한글로 기재할 때 '류(柳)' '라(羅)' '리(李)'처럼 소리 나는 대로 쓸 수 있게 됐다.
이와 유사하게 휴대전화 번호도 자기 정체성과 관련돼 있다는 것이 011 등 구 번호 사용자들의 주장이다. 실제 전화번호를 알려줄 때 예전엔 '우리 집 번호는…'이라고 말했지만 휴대전화의 등장 이후 '내 번호는…'이라고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이 그 근거다.
게다가 자기 번호에 강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좋은 번호를 비싸게 구입하기까지 하는 실정에서 국가가 휴대전화 번호를 강제로 010으로 통합하긴 쉽지 않다는 것이 통신계의 관측이다. 때문에 방통위 일각에서는 010 번호가 97%가 이르러야 강제통합 환경이 조성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지난 5년간 꾸준하게 추진돼온 정책이 소비자의 반발로 흐지부지 될 경우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정부의 의지만을 믿고 011 번호를 포기하고 010으로 옮겨 탄 이들의 불만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방통위의 고민이 깊어 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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