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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하면 큰 코 다치는 분, 이번 주는 비서 주간

입력 | 2009-04-22 16:29:00

커피와 잔심부름으로 대변됐던 비서의 위상은 크게 향상됐다. 그러나 최근 비서의 위기는 고용의 변화에서 찾아오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자료사진

지난해 개최된 비서의 날 행사장면 (한국비서협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사건.

영원히 베일에 가려져 있을지도 모를 검은 로비를 밖으로 끄집어 낸 결정적 계기는 대학 졸업 후 10여 년간 박 회장의 비서로 근무해 온 여직원의 업무수첩이었다.

이 수첩에는 박 회장이 만난 사람과 장소 일시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불행하게도 박 회장은 자기 비서가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는 줄 몰랐던지 증거 인멸에 빈틈을 보이는 바람에 몰락을 '자초'한 셈이다.

최근 불거진 청와대 비서진들의 낯부끄러운 행태 역시 대통령의 정치적 위상에 타격을 끼친 사건으로 회자된다. 비서의 몸가짐 하나하나가 곧 보스의 통치행위임을 인식했다면 과연 그러한 행동을 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4월22일은 세계 비서의 날

올해는 '지구의 날'에 상대적으로 가려졌지만 22일은 58번째 '비서의 날'이다. 이 독특한 기념일은 1952년 미국에서 비서들의 수고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비서직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시작됐다.

미국과 서구에서는 이 주간에 CEO들이 자신의 비서에게 멋진 선물을 전달하는 것을 하나의 전통으로 삼고 있다. 국내에서는 (사)한국비서협회 주관 행사 정도로 마무리되는 것과 크게 대비된다.

한 법무법인에서 일하는 20대 비서는 "국내에 비서의 날이란 게 있었느냐?"고 되물으면서 "업무에 바빠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못하고 산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거의 모든 '장(長)급' 직위뿐만 아니라 이사급 이상에는 비서가 따라붙는다. 변호사나 회계사 등 전문직들은 직위에 무관하게 공동 비서를 두고 업무 효율을 얻는다. 국내에서도 적게는 20만 많게는 최대 50만에 달할 정도로 비서직에 종사하는 이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

업종에 따라 단순 사무보조에서 전문 보좌업무에 이르기까지 업무의 폭도 다양하다. 비서로 인해 얻는 효율성이 크기 때문에 화이트칼라 사이에서는 비서를 두는 위치에 오르는 것이 바로 성공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비서의 경쟁자는 사무자동화? 고용의 변화!

그러나 1980~90년대 여성 사무직원의 꽃으로 불렸던 비서직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이화여대 비서학과는 벌써 10년 전 학과의 명칭을 '국제사무학'으로 바꾸었다.

사회적 인식의 변화도 비서의 위상을 낮추는 계기가 됐다. 실제 과거엔 여성고급인력들이 비서를 지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바로 CEO를 지망하는 시대가 됐다. 때문에 한때 급증했던 비서학과는 이제는 전문대학을 중심으로 20~30여개가 존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비서의 영역을 빼앗아간 '원흉'은 누구일까?

가장 직접적 이유는 컴퓨터로 인한 '사무자동화'다. 한국비서협회 최방원 사무국장은 "과거엔 큰 기업이라면 이사뿐 아니라 부장까지 비서가 따라붙곤 했다"면서 "그러나 이제는 컴퓨터의 발달로 단순 업무 보조 비서는 자취를 감췄다"고 설명한다.

IT의 발달과 민주적인 분위기의 확산도 전통적인 비서의 영역을 빼앗은 중요한 요인이다. 예전엔 비서가 전화를 연결하고 음료를 내왔다면 이제는 CEO가 직접 휴대전화로 중요한 통화를 직접 하며 차를 손수 내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사무보조의 영역일 뿐 비서의 핵심 영역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오히려 보스의 오른팔 역할을 하며 높은 판단능력과 센스를 갖춘 비서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직 비서들의 주장이다.

비서협회 최 국장은 "비서의 일처리 하나하나가 바로 회사의 운명과 직결돼 있다"면서 "과거 단순한 업무보조 역할을 비서의 몫이라고 여겼다면 갈수록 최고책임자를 보좌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전문직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비서(Secretary)의 본질은 보안유지(Secret)

그러나 이 같은 비서의 진화에도 걸림돌이 없지 않다. 바로 고용의 변화다.

최근 불어 닥친 경제위기는 '비서의 위기'라고 불릴 정도로 주로 여성들이 차지해온 비서직을 뒤흔들고 있다. 대기업을 제외한 중소기업의 경우 비서직을 파견직이나 임시직, 심지어 아르바이트로 고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비서협회 관계자들은 "다른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회사의 기밀을 다루고 퇴직 후에도 보안을 생명으로 여기는 비서직을 정규직으로 뽑지 않는 것은 기업의 미래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분개한다.

실제 서구에서 중요 보직의 비서를 비정규직으로 뽑는 사례는 거의 없다. 비서의 생명은 비밀유지라는 신념 때문이다. 비서라는 이름 자체에 '시크릿(Secret·비밀)'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도 그 때문이란다.

한 대기업 비서실에 근무하다 10여 년 전 퇴직한 한 여성은 이렇게 정리했다.

"내가 일하면서 보고 들은 수많은 사건들은 바로 다음날 신문 1면 기사가 될 수 있을 만큼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퇴직한지 오래 되었지만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러한 정보들을 무덤까지 갖고 가겠다. 그게 바로 내 직업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