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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박물관 100년의 사람들]김정기 前한림대 교수

입력 | 2009-04-23 02:58:00

김정기 전 한림대 교수가 국립박물관 고고과장으로 있었던 1950, 60년대 고고학 유적 중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발굴된 유물을 맥락 없이 전시하지 말고 어린이도 이해하기 쉽게 입체적으로 선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1950, 60년대 유물 발굴 도맡은 김정기 前한림대 교수

“천마총서 금관 들고 나오자 갑자기 폭우”

“억!”

보수를 위한 석탑 해체가 한창이던 1959년 12월 31일 경북 경주시 감은사지. 영하의 추위에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이곳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14m 높이의 석탑 3층 옥개석(석탑에 지붕처럼 덮는 돌) 아래 받침돌을 밟은 김정기 전 국립박물관 고고과장(79·당시 29세·전 한림대 교수)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가 밟은 받침돌 일부가 2층 옥개석 위로 떨어지면서 추락할 위험에 처한 것. 순간 뛰어올라 석탑 주변의 나무 비계(높은 곳에서 공사할 수 있게 설치한 임시 가설물)를 붙잡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받침돌을 들어내자 네모난 구멍 안 흙 속에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안고 이 흙덩어리를 손으로 들어올렸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1300여 년 전의 사리상자(보물 제366호)가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를 알린 순간이었다. 그는 이 사리상자를 비롯해 국보 188호 천마총 금관, 국보 191호 황남대총 금관, 국보 207호 천마도장니(障泥·말 탄 사람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늘어뜨린 것)를 직접 들어올린 주인공이다. 송의정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이 그를 만났다.

송의정=발굴 경험자가 없던 1950년대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1909∼1990)이 일본에서 유학하며 발굴 현장을 누비던 선생님에게 귀국을 권유했죠. 박물관에 재직했던 1950, 60년대 한국의 거의 모든 유적이 선생님의 손을 거쳤습니다.

김정기=1959년 귀국해 처음 발굴한 감은사지는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이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기 위해 용이 돼 드나들었다는 곳이죠. 삼국유사에 ‘(문무왕이) 죽어 바다의 용이 됐다…금당(사찰 본당) 밑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 하나를 냈는데 이 구멍으로 용이 들어와 돌아다니게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엔 설화로만 여겼죠. 그런데 금당 터에서 이 ‘용혈(龍穴)’에 해당하는 지하 공간을 찾아낸 겁니다.

감은사지 사리함 발굴 땐

14m 석탑서 추락위기 넘겨

고고학이 전설을 역사로 재탄생시킨 사건이었다. 그는 1970년대 경주 황남대총과 천마총을 잇달아 발굴했다. 발굴 기간 중 40여 일에 한 번씩 집에 가면 부인이 “왜 점점 머리가 하얗게 변하느냐”고 물을 정도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경주 시민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대형 고분을 훼손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송=금관이 나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김=흥분보다 실수 없이 금관을 수습하는 게 급선무였어요. 두 금관 모두 내가 직접 들어올렸습니다. 행여 훼손되더라도 책임을 지겠다는 심정이었죠. 금관을 들고 고분 밖으로 나오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고 비가 쏟아졌습니다. 사무실로 급히 가다가 돌을 잘못 밟고 다리를 다쳐 며칠간 고생하기도 했죠.

미라의 저주를 연상시키는 일화다. 천마도장니 발굴은 금관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는 ‘내 평생에 안 나와야 할 유물이 나왔다’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김=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그림이 1500년 동안 땅속에 있다가 나왔으니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수차례 시도 끝에 천마도장니를 겨우 들어올린 뒤 재빨리 켄트지와 베니어판을 아래에 대서 형태를 유지하고 보전 처리를 위해 서울 국립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차가 고장 나면 천마도장니도 끝장이기 때문에 빈 차 한 대가 따라갔습니다.

전형필 선생 인재사랑 유별나

매일 박물관 들러 밥 사줘

그는 간송미술관을 세운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 선생(1906∼1962) 이야기도 들려줬다. “문화재뿐 아니라 문화재를 보존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거의 매일 국립박물관에 와 직원들에게 저녁을 샀어요. 저녁 늦게 선생 집에서 고려청자 사발에 술을 마셨던 생각이 납니다. 눈으로만 봤던 고려청자에 술을 담아 마시는 기분이라니….”

송=박물관 시절 대부분을 사무실보다 발굴 현장에서 보냈습니다.

김=역사에 남을 유물을 많이 발견했지만 정작 유물 때문에 기분이 좋았던 적은 없습니다. 유물은 역사의 옛 흔적을 발굴하는 과정 중 하나입니다. 세간의 관심을 끌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유적의 발굴 성과까지 폄훼하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공동 : 동아일보,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