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처음 막을 올린 연극 ‘봄날’(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은 산골마을 늙은 아비와 일곱 아들의 이야기다. 인색한 아비는 곳간 열쇠를 쥐고 장성한 아들들에게 폭군처럼 군림한다. 아들들은 그런 아비가 죽을 날만 학수고대한다. 예외는 장남뿐. 언제가는 아비가 땅을 나눠줄 것이라고 동생들을 다독인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날 아비는 어린 소녀를 안고 자면 젊음을 회복할 것이란 꿈에 부풀어 길을 나섰다가 ‘씨’를 뿌리면 말짱 도루묵이란 말에 낙담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남은 그런 아비를 업고 동생들에게 땅을 나눠달라고 부탁한다. 도리질 치던 아비도 장남의 간곡한 설득에 이를 약속한다. 맏이는 너무도 기분이 좋아 자꾸 “아버지…” “아버지…”를 부른다. 성마른 아비가 “왜 자꾸 불러”라고 역정을 낸다. 아들은 답한다. “아버지를 업고 가니깐 좋아서요.” 아비가 다시 “씨 알맹이 다 빠진 쭉정이만 남은 아비를 업고 가는데 뭐가 좋아”라고 타박하지만 아들은 “그래도 좋은 걸요”라고 답한다.
그 순간 무대에서 장남 역을 연기하던 이대연 씨의 목이 멨고 눈이 충혈됐다. 객석 곳곳에서 눈물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등에 업혀있던 아비 역의 오현경 씨는 그런 그를 꼭 껴안아줬다.
이 씨는 이날 새벽 부친상을 맞았다. “워낙 연세가 많으셔서 마음속으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첫 공연을 보시고 임종하시길 바랐는데….”
그는 2001년에도 연극 ‘돼지 사냥’의 연장 공연을 앞두고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한 뒤 5일 만에 숨진 일을 겪었다. 아내의 유해를 고향 충북 제천에 묻고 이 씨는 평소 연극에 전념해 달라는 아내의 뜻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그는 이번에도 관객과의 약속을 지켰다. 제천에서 숨을 거두신 아버지 시신을 공연장과 가까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모신 뒤 공연 시간 외에는 빈소를 지켰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서울연극제를 빛낸 9편 중 하나로 선정된 ‘봄날’은 아비의 독재에 반기를 들고 대처로 떠나간 동생들이 고향의 아비를 그리워하고, 아비도 그런 아들들을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 애틋한 장면이 이 씨의 사연과 겹쳐진 때문일까.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은 눈물을 훔치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애써 밝은 표정으로 무대를 지킨 이 씨는 커튼콜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25년 전 초연 때 맡았던 배역을 변함없는 연기로 소화해 낸, 그리고 짧은 순간 진짜 아버지가 돼준 선배 오현경 씨에게 뜨거운 갈채를 보냈을 뿐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