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학공업, 말썽도 많았지만…
세계적 불황기에 판로개척 어렵자
언론 “중화학 과잉투자” 연일 비판
1974년 8.5% 성장 주춧돌 역할
국내 과잉투자와 두 번의 오일쇼크가 몰고 온 인플레이션, 국제수지 악화를 무릅쓰고 박차를 가해 온 중화학공업 사업들이 완성 단계에서 세계적 불황으로 판로를 찾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고 있었다. 국내외 경제학자들과 언론들은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 때문에 한국 경제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떠들어댔다. 설상가상으로 중동에 대한 과다 진출이 초래한 건설업의 부실 경영과 이에 따르는 금융부조리가 언론에 크게 부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과잉투자를 조정하고 생산업체 간의 교통정리를 하느라 정부가 크게 고심했지만 만약 그때 중화학공업을 추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80년대 들어 각종 대형 설비 및 원자재 가격은 오일쇼크 이후 몇 배나 올랐고 국내에서도 임금, 토지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했는데 만약 이 시기에 중화학공업 건설에 착수했다면 건설비만 하더라도 3, 4배는 더 들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1980년대에 달라진 국제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외자를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1980년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중화학공업을 추진할 만한 정치력이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
생각해보면 중화학공업 건설은 경제적 타산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일본을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해 경제가 황폐화된 일본에서 1950년대 초에 제철 자동차 선박 등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게 된 이면에는 일본 통산성의 적극적인 지원과 흔히 말하는 ‘정경유착’이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중앙은행 총재를 비롯한 일부 정책가와 경제학자들은 일본 경제의 실력을 도외시한 망발이라고 정부를 비난했다. 그러나 업계와 정부가 일체가 돼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노력한 결과 일본을 세계 경제강국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에게는 박정희 대통령의 비상한 결단과 추진력이 있었고 그를 지지하는 정치세력과 대통령경제제2수석비서관을 지낸 오원철 씨가 말하는 ‘산업군단’, 그리고 실물경제를 뒷받침하는 재정 금융의 관료조직이 있었기에 과업을 해낼 수 있었다고 나는 본다. 만약 그것들이 없었다면 1973년 10월에 몰아닥친 제1차 석유파동의 충격 앞에서 우리는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경제이론만으로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어쨌든 1970년대 초의 건설기를 지나면서 중화학공업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제1차 석유파동으로 1974년 하반기부터 선진국이 불황 국면으로 접어들어 미국과 일본은 1974년 상반기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이 전년 동기대비 ―3%, ―3.7%로 각각 급락했다. 반면 한국은 GNP 성장률이 1973년 14%에 이어 1974년에도 8.5%를 기록했는데 이는 주로 수출이 급신장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중화학공업 제품 덕분이었다. 그리고 1982년부터 중화학공업 제품 수출이 경공업 수출을 앞지르게 됐고 이후 중화학공업 제품이 우리나라 수출의 주종을 이루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