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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커피는 못 봐도 커피향은 보여요”

입력 | 2009-04-28 02:55:00

27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카페모어’에서 커피를 만들고 있는 시각장애인 바리스타 정승아 씨(왼쪽)와 현정희 씨(오른쪽). 시각장애인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드는 커피전문점은 이곳이 처음이다. 홍진환 기자


시각장애인 정승아 - 현정희 씨, 커피점 취직 새 인생 도전

안마사 숙명인가 했다가 바리스타 교육과정 지원

손으로 재고 코로 느끼며 이젠 하트거품도 그려요

“하나 둘 셋….” 27일 찾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관 1층에 있는 ‘카페모어’. 1급 시각장애인 바리스타(즉석에서 커피를 만들어주는 사람) 정승아 씨(37·여)는 숫자를 세며 우유를 따랐다. 원두를 스푼에 담을 때는 손으로 눌러보며 양을 맞췄다. 정 씨는 “커피 맛은 재료의 양을 정확히 맞춰야 하는 게 중요한데 앞이 잘 안보이니까 모든 감각을 최대한 활용한다”며 직접 만든 카페라테를 내놨다. 우유와 알맞게 섞인 커피향이 은은했다.

손님이 들어오자 정 씨의 동작이 다시 바빠졌다. 카페모어는 눈이 아닌 감각으로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들의 손길로 분주했다.

○ 시각이 없으면 다른 감각으로

20여 년 전 망막색소변성증이란 병을 앓은 정 씨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남은 시력은 0.02 정도다. 학창시절에는 친구가 읽어주는 교과서를 외워가며 시험을 치렀다. 사회에 나와서도 안마사나 텔레마케터 정도를 제외하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른 직업을 구하던 정 씨는 때마침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 바리스타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내자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처음에는 물을 맞추기조차 힘들었다. 뜨거운 기계를 만지다 보니 손을 데이는 것도 예사였다. 버튼의 위치를 기억하고 카페 내부의 동선도 머릿속에 그려 넣어야만 했다. 정 씨는 “지금도 손님이 밀려들면 등에서 땀이 흐르지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든든한 후원자도 있다. 큰아들 송민규 군(11)은 엄마가 만들어 준 주스를 친구들에게 나눠줄 때가 제일 뿌듯하다고 말한다.

○ 쥐를 다섯 번 잡으면 카푸치노

정 씨와 함께 일하는 현정희 씨(31·여) 역시 1급 시각장애인이다. 백내장을 안고 태어나 4세 때 수술을 받았지만 왼쪽 눈의 시력을 아예 잃었다. 오른쪽 눈도 희미하게만 보이는 상태. 현 씨는 6년여 동안 안마사로 일하다 바리스타가 됐다. 현 씨는 “교육을 받으면서 과연 내가 할 수 있을지 의심도 많이 했지만 ‘나는 할 수 있다’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이겨냈다”고 말했다.

현 씨 역시 모든 감각을 활용한다. 커피에 거품을 띄울 때는 나름의 공식이 있다. 거품 기계 손잡이를 다섯 번 당기면 카푸치노, 두 번을 당기면 카페라테에 맞는 거품이 나온다. 정 씨는 “교육 받을 때 카푸치노는 ‘쥐를 다섯 마리 잡으라’고 배웠어요. 거품 기계 손잡이를 당기면 찍찍 소리가 나거든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현 씨는 커피 위에 거품으로 예쁜 모양을 만들어 내는 ‘라테 아트’에도 관심이 많다. 예쁜 하트 모양으로 거품을 그려내 손님들에게 서비스하기도 한다.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관은 지난해 5월부터 12월까지 3기에 걸쳐 15명의 시각장애인 바리스타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10주간의 교육을 통해 바리스타로 인정받았다. 복지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울시 사회공동모금회의 지원과 자체 예산을 합쳐 커피전문점을 직접 열었다. 이달 20일 문을 연 카페모어에서는 4명의 시각장애인 바리스타가 2명씩 교대로 일하고 있다. 복지관 직원 함요한 씨는 “시각장애인들은 안마사 등 한정된 일밖에 할 수 없어서 취업률이 상당히 낮은 편”이라며 “이번 사업을 계기로 시각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자리를 더 많이 찾아보고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복지관 측은 올해도 교육과정을 열어 바리스타를 양성한 뒤 체인점도 점차 늘려갈 계획이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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