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교환방식을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전환함에 따라 가입전화기 수는 1978년 187만 대에서 1982년 400만 대로 크게 늘었다. 1970년대 전화국 교환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전자시대를 열다(2)
“전자식 전화 도입” 공표하자 시끌
기존 업체 반대로비 거셌지만 강행
교체후 전화 적체현상 사라져
전화 교환방식을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기자회견에서 공표하자 기자들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1976년 2월 경제 각의의 의결을 거쳐 경상현 박사가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전자교환기 도입의 타당성 조사를 의뢰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업체들은 맹렬한 로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현재 교환기의 수명이 남아 있는데 새 시설을 도입해 외화를 낭비하고 중복 투자를 하려 한다고 김재익 계획국장을 매도하기 시작했고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통해 압력을 가했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체신부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나는 김 국장에게 두 업체의 교환기 투자의 감가상각 자료를 구해보라고 지시했다. 한편 체신부 차관을 불러 설득했으나 좀처럼 수긍하지 않는 눈치였다. 김 국장은 감가상각 자료를 구했다며 나에게 보고했는데 한 업체는 감가상각이 이미 끝난 상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사실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체신부의 방침도 보고했다. 결국 1976년 2월에 체신부 차관이 경질되고 대통령수석비서관인 이경식 씨가 그 자리로 가게 됐다.
체신부 실무자들이 반대하는 것은 전자통신에 관한 정보와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므로 체신부 산하에 전자통신연구소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김 국장과 이 차관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해 예산에 필요 경비를 계상(計上)하도록 해 1977년 한국통신연구소가 개설됐다. 통신기술 연구와 개발을 위해 설립된 이 연구소에는 경 박사가 선임 연구부장으로 취임했다. 이리하여 정부 내의 추진체제는 완전히 정비된 셈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두 업체와 전자교환기 도입을 선점하려는 2개 업체 간의 각축과 정치권에 대한 로비가 치열했다. 1977년 12월, 체신부는 아파트나 주거 밀집지역에서 민간기업이 자동집단전화시스템(PAPX)을 설치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기술기준을 법으로 정하도록 하는 전기통신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교통체신위원회는 이에 대한 정책질의를 마치고 조문 정리와 세부심의를 5인 소위원회로 넘겼는데 5인 소위는 심의 과정에서 위탁 집단전화를 설치할 경우 전화기종은 ‘체신부가 공중 통신으로 채택해 사용하는 기종’으로 한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이렇게 되면 4개 전자업체 중 체신부가 사용 중인 2개 업체의 기종만을 사용하게 되는 결과가 돼 다른 업체가 반발하고 나섰다. 국회 내외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는데 나는 국회 답변에서 정부의 방침을 강력히 고집해 결국 이 문구는 삭제됐다
우여곡절 끝에 전자교환기의 국제경쟁 입찰을 시행하게 됐는데 벨기에 BTM사의 기종(M10 CN)이 선정됨으로써 서독 지멘스사의 EMD시스템 독점체제는 막을 내렸다. 1977년 10월 경제기획원이 삼성전자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사의 합작투자를 인가함으로써 전자교환기 생산이 다원화되고 경쟁체제로 돌입했다. 전자교환기 도입에 따라 가입 전화는 1978년 187만 대에서 1982년에는 400만 대로 증가했고 이후부터 전화 적체는 옛날이야기가 됐다. 정보화시대로 가는 길도 순탄치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