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자료사진
# 장면 1
지난달 중순 서울 신촌의 한 이자카야(일본식 선술집).
일본 여성 8명이 우르르 몰려와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앉자마자 그들이 주문한 음료는 일본 술 '사케'가 아닌 '소폭'(맥주와 소주를 섞은 소위 '소주폭탄주'). 각자 자신의 앞에 놓인 맥주잔에 소주 반잔씩을 털어 넣고 건배를 한 뒤 '소폭'을 들이킨 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오이시이!(おいしい·맛있다)"를 외쳤다.
# 장면 2
서울에서 전자제품 도매상을 운영하는 이철민 씨(39)는 최근 한국을 방문한 일본 측 사업 파트너들의 제안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왕 술을 마셔야 한다면 '소폭'으로 하자는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실제 술자리에서 일본 파트너들이 능숙하게 소폭을 제조해 술잔을 돌리는 모습에 두 번 놀랐다. 그는 "과거에 알던 일본들은 술을 섞어 마시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최근 한국을 오가면서 소폭을 배운 것 같다"며 "덕분에 술자리가 훈훈해져 사업 추진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식 음주문화인 '소폭'이 최근 일본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엔고 특수에 힘입어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이 폭증하면서 화끈한 한국식 음주문화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일본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때문에 업계에서는 소폭도 한류화(化)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까지 내비치고 있다.
● 일본인들이 소폭에 열광하는 이유는?
근래 일본에서 한국 소주가 고급 주류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지만 얼음과 함께 마시거나 칵테일로 마시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서지현 씨(43)는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일본 측 지인들에게 직접 '소폭'을 전수한 케이스다.
"일본의 음주문화가 조금 딱딱한 것이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그저 술잔에 술을 따라주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가 '제조'의 재미를 알려주니 금방 몰입하더군요. 소주잔을 띄우고 가라앉히면 안 된다는 등의 '미션수행'에 특히 흥미를 갖는 것에 놀랐습니다."
서 씨는 일본 직장인들이 소폭에 열광하는 이유로 △저렴한 가격 △친목도모 △개개인 주량에 맞춘 커스터마이징 △이국적인 문화 등등을 꼽았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매력은 일본에 소폭과 유사한 '독한 음주문화'가 없다는 점.
"맥주나 사케로는 비즈니스에 적당할 정도로 취하기 힘들잖아요. 그렇다고 양주를 마시는 것은 부담스럽고, 그 때문에 '비즈니스 알코올'로 소폭이 히트작이 된 것같아요."
최근 서 씨를 찾아온 일본인 역시 '소폭'을 함께 마신 뒤 "적당한 가격에 적당히 취하고 즐겁게 헤어질 수 있었다"면서 소폭 예찬론을 펼쳤다고 한다.
미쓰이 상사 한국지사에 일하는 P씨(30)는 "한국에 잠시라도 왔다 돌아온 일본인이라면 누구라도 폭탄주 경험을 마치 무용담처럼 이야기 한다"면서 "소폭에 대해서도 대부분 신기해하고 '대단하다(스고이·しごい)'고 말한다"고 전했다.
● 드라마의 저 녹색병이 뭐죠?
'소폭'의 인기 배경에는 한국 소주의 빠른 국제화도 자리잡고 있다.
소주는 한국문화의 세계화와 함께 빠르게 해외로 전파됐다. 특히 일본에서 한국 소주의 선전은 매우 이례적이다. 진로는 단기간에 일본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일본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롯데가 5030억 원을 들여 두산의 소주 사업을 인수한 것도 일본 내에서 소주의 인기가 급상승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한국 드라마가 일본과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끈 '한류 열풍'도 '소폭'의 인기 상승에 한 몫 했다.
일본 누리꾼들의 대표적인 커뮤니티인 '2ch'이나 홍콩과 싱가포르의 방송 게시판에는 예외 없이 "한국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녹색병이 뭐냐?"고 묻는 질문과 호기심 섞인 글들이 올라온다. 이 같은 궁금증이 즉각 소주의 매출로 이어져 소주의 국제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됐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소주가 19도 이하로 내려간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여전히 23~25도다. 이를 통해 소주는 사케보다 강하고 양주보다는 저렴하다는 점을 무기로 앞세워 직장인들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한류에 편승해 한국식 '소폭' 문화를 시나브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
● 소폭의 인기는 세계적인 경기불황 때문?
국내에서도 '소폭'은 2000년대 이전까진 일부 주당(酒黨)들 사이에서만 유통되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양주 폭탄주(양폭)'의 대체물로 급속히 확산됐다. 요즘 술을 파는 식당이라면 어디에서든 자연스레 '소폭'이라는 표현이 통용되고 있다. '소폭'의 인기는 과거 폭탄주의 대명사이던 양주의 매출까지 급감시켜 버렸다.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는 김 모씨(41)는 "16대 때인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양주 폭탄주를 거의 매일 먹다시피 했다면 17대에는 조금씩 소폭을 먹기 시작했고, 18대에는 거의 매번 소폭을 먹는다"고 귀띔했다.
'소폭' 제조법은 양주 폭탄과 흡사하다.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양폭'과 '소폭'의 알코올 도수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주류업체에서 검증한 바에 따르면 35cc 양주잔에 양주를 가득 채운 뒤 230cc 맥주잔에 넣을 경우 알코올 도수는 10.35도가 나온다고 한다. 반면 같은 크기의 맥주잔에 소주잔(55cc)을 넣어 마시는 '소폭'의 알코올 도수는 9도 가량이라는 것.
게다가 폭탄주가 특별하게 건강에 나쁜 것도 아니라고 한다. 간박사로 유명한 이종수 교수에 따르면 "서로 다른 술을 섞어 마시는 것 자체로는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것. 이 때문인지 '소폭'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른다.
이 같은 소폭의 인기배경에는 일본과 한국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경기침체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한국을 자주 방문하는 한 일본인 사업가는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일본에서도 빨리 취하는 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소폭'만한 게 없다"면서 "만들어 먹는 재미도 있어서 더 싸고 강한 술이 나와도 쉽게 '소폭'을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웃었다.
정호재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