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기타학원 선생이 말했다.
“사람에겐 두 가지 슬픔이 있지. 처절한 슬픔과 애절한 슬픔. 인간의 비통하고 처절한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악기는 바이올린이라고 해. 하지만 눈물이 맺힐 듯 말 듯 애절한 슬픔은 세상에 기타를 따라올 악기가 없지.”
그 말이 뭔지 모르게 빡빡머리 중학생의 가슴에 뜨겁게 닿았다. 그날따라 손가락 부어터지는 줄도 모르고 연습을 했던 것 같다.
그래봐야 그날의 연습곡은 ‘애절한 슬픔’과는 별 연관이 없어 보이는 샌드 페블스의 ‘나 어떡해’였지만.
드니 성호 얀센스라는 이름의 기타리스트가 있다. 한국계 벨기에인이다. 가운데 ‘성호’라는 이름이 그가 한국계임을 드러내는 유일한 열쇠이다.
성호씨는 197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부모가 없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그는 부산시청 앞에 버려졌다. 이후 고아원에 보내졌고, 생후 9개월 만에 ‘좋아하는 것은 우유이며, 그 밖에 신체적 특성은 없다’라는 서류 한 장과 함께 포대기에 싸여 벨기에로 입양되었다.
2006년 성호 씨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것은 자신의 ‘뿌리(그는 이 발음을 정확히 할 수 있었다)’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가 가진 단서는 자신의 이름이 ‘신성호’이며, 자신이 머물렀던 고아원의 장소가 전부였다.
물론 아직까지 친부모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성호 씨는 한국과 벨기에를 오가며 살고 있다. 3년이란 세월은 그를 변화시켰다. 그는 더 이상 부산을 찾지 않는다. 대신 기타를 들고 모국의 음악팬들을 위해 연주한다. 자신을 버렸던,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토록 만나고 싶은 친부모가 자신의 연주를 듣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의 손가락을 통해 울려 퍼지는 6현 나일론 줄의 소리는 그의 ‘사모가(思母哥)’다. 그 옛날 기타선생이 말했던 애절한 슬픔이다.
공연을 앞두고 다시 한국을 찾은 성호 씨를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한국말이 서툰 그와 영어로 인터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