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흡혈귀 영화’를 예상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영화 ‘박쥐’. 혹여 박찬욱 감독은 관객과의 소통의 끈을 끊어 버린 건 아닐까. 사진 제공 CJ엔터테인먼트[화보]영화 ‘박쥐’ 제작보고회
박찬욱 감독 ‘박쥐’속의 비유…상징… 철학적 부호
어렵게 더 어렵게… 관객에 대한 배신
‘올드보이’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뒤 박찬욱 감독은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대중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이젠 그의 영화를 보고도 평론가나 대중이나 “재미없다”는 얘기를 쉽게 하지 못할 정도다. 신작 ‘박쥐’는 13일 개막하는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올랐으니, ‘송강호가 나오는 야하고 잔인한 흡혈귀 영화’ 정도를 예상하고 극장을 찾은 대중은 실망의 반응조차 보이기 조심스럽다. 그는 문화 권력인 것이다.
하지만 박찬욱의 영화 ‘박쥐’는 걱정스럽다. 전작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조짐이 보였지만, 그는 이 영화를 기점으로 대중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만 같다. 그는 공고한 자기 세계에 빠져들면서 대중과의 소통 문을 닫아버리는 자폐적 모습을 보여준다.
‘박쥐’에는 사건과 행위와 이야기가 당혹스러울 만큼 다이어트되어 있다. 신실한 신부였던 상현(송강호)이 흡혈귀가 되는 과정, 흡혈귀가 됨으로써 새로운 정신적 신체적 권능을 획득하는 과정, 그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 같은 대목은 의도적인 설명 부족 상태로 놓아둔다. 그건, 박찬욱 세계의 중요한 색깔이다. 박찬욱은 관객이 장르적으로 익숙한 장면, 그래서 관객이 습관적으로 기대하는 사건들을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 대한다. 그러면서 장르를 비틀고, 결국엔 뛰어넘는다. 심각한 시추에이션과 뜬금없어 보이는 대사가 기괴하게 충돌하면서 수준 높은 유머가 만들어지고, 끔찍한 장면을 보면서도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는 기묘한 상황! 이것이 박찬욱 월드다.
‘박쥐’에서 박찬욱의 관심사는 흡혈귀가 아니다. 억압받는 삶을 살아온 상현과 태주(김옥빈)가 자웅동체인 양 서로에게 끌리며 지독한 사랑에 빠지고, 흡혈귀가 됨으로써 사랑을 완성시키려고 발버둥치다가 욕망의 죄책감과 딜레마에 빠지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다시 말해 이건 미친 사랑의 얘기고, 에덴동산의 원죄 얘기며, 사랑의 종착역인 지옥의 얘기고, 속죄와 구원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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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의 문제는 형이상학적이고 어려운 주제를 더 형이상학적이고 더 어려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 있다. 영화엔 촘촘한 이야기가 없다. 무수한 상징과 심리의 기호가 이야기 자체다. 여주인공 태주가 입버릇처럼 하는 대사를 빌리자면, “말하자면 심리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상현과 태주의 섹스 신에서 상현이 태주의 거친 맨발에 유독 집착하며 쭉쭉 빨아대는 것도 상징이고, 상현이 태주를 안고 지그재그 모양의 계단을 하염없이 걸어 올라가는 것도 종교적 신화적 상징이다. 신경질적인 캐릭터들과 사건들은 질식할 만큼 초현실적이고, 느슨한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인공은 바로, 지적인 말의 유희다(불행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복집의 이름이 ‘행복한복’인 데서 오는 역설처럼). 그러다 보니 김옥빈의 연기는 필요 이상 오버하고, 송강호의 연기는 필요 이상 눌렸다.
‘박쥐’를 보다 보면 등장인물보다 더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건 나 같은 평범한 관객이다. 짜증이 난다. 꼭 이런 비유와 상징들을 알아야 되는 건가? 무슨 영화 보는 게 철학책 읽는 거보다 더 어렵냔 말이다. 영화에서 송강호가 파격적으로 성기를 노출하는 장면도 ‘아, 우상화된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기 위한 절망적 속죄 행위와 다를 바 없구나’ 하고 열심히 생각하며 봐야 하는가 말이다. 난수표를 해독하는 것 같은 이런 머리 아픈 경험 외에는, 영화에서 나는 어떤 이야기의 쾌감도 느끼지 못하였다.
박찬욱은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예술적 성취를 이뤄오면서 상업영화의 외연을 넓힌 감독이다. 그래서 박찬욱은 현재 한국에서,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이다. 그래서 ‘박쥐’는 더 안타깝고, 더 화가 난다. 열혈 팬 10만 명 정도가 보면 딱 좋을 사이즈의 영화를 두고, 송강호를 캐스팅하여 ‘흥미진진한 흡혈귀 블록버스터’를 보여줄 것처럼 마케팅을 하다니…. 이건 관객에 대한 배신이다.
‘박쥐’를 보면서 덜컥 겁이 났다. 이건 말하자면, 이명세 감독의 영화 ‘M’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었다. 한때 ‘이 시대 최고의 비주얼리스트’란 찬사를 한 몸에 받았던 이명세는 난해한 영화 ‘형사’에 이어, 빛과 그림자로 이뤄진 비주얼을 극단까지 몰고 간 ‘M’을 통해 관객으로부터 완벽하게 이혼당했다. 난 박찬욱이 이명세의 길을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기 세계가 분명한 게 예술이지만, 자기 세계를 탈출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게 예술가 아닌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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