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분한 얘기 좀 해야겠다. 6·25전쟁 중 서울의 모든 대학은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란 가서 판잣집 교실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바닥은 마루도 깔지 않은 맨땅. 천장에서 비가 샐까 봐 판잣집지붕 위에 천막 같은 것을 뒤집어씌우고 있었는데 이것이 항도의 억센 바람으로 나부끼면 나무판자(판잣집 강의실)들을 후려쳐 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강의실 몰골이 그 모양이었으니 판잣집 대학의 화장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변소’) 사정은 더욱 지저분했다. 그런데도 그곳에 들어가면 내겐 심심치 않은 즐거움이 있었다. 서울대 학생들의 당시 ‘인문주의적 소양과 교양(?)’을 맘껏 발휘한 온갖 낙서가 경연(競演) 경염(競艶)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50년도 훨씬 넘은 옛날에 본 그 낙서를 지금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하나 잊지 않고 있는 것은 지저분한 벽면에 ‘축(祝) 서울대 변소문학 창간’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적어 놓은 낙서였다. 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걸 시위한 일종의 ‘메타 낙서’라고나 할까.
노경에 젊은 대학시절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 데엔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즈음 다시 날로 지저분해지기만 하는 인터넷의 댓글을 보게 되면서다. 더욱이 이 인터넷의 ‘변소문학’에는 인문주의적 소양과 교양을 뽐내는 재치나 해학 같은 표현은 거의 없다. 있는 것은 대부분 야비한 욕설이요 적의에 찬 비방이다. 그러한 구질구질한 말을 익명성의 음지에서 쏟아내는 어느 포털 사이트를 ‘아고라’라고 명명한 것은 얄궂다.
화장실 낙서만도 못한 인터넷 댓글
고대 아테네의 광장 아고라는 로마시대의 포럼(Forum Romanum)의 전신이다. 둘은 다같이 공공정치의 무대이자 레토릭이 경연 경염하던 공공연설의 무대이기도 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 로마의 공화정에서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은 아고라나 포럼에서 시민 대중을 설득하는 말솜씨에서 나왔다. 소피스트의 레토릭(웅변술, 변론술)과 그에 대결했던 소크라테스의 다이얼렉틱(문답법, 변증술)이 다같이 아고라에서 발달한 것이다.
말(로고스)의 능력이야말로 오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기요, 그렇기에 바로 말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인간성(휴머니티)의 본질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따라서 말을 훌륭하게 구사하기 위해 배우는 문법학, 논리학, 수사학이 무릇 서양 인문학(휴머니티 사이언스)의 기초가 됐다. 혼자서 생각하거나 독백을 하는 데엔 굳이 말을 잘 다듬거나 아름답게 꾸밀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말은 혼자보다도 남과, 더욱 많은 남과 소통하기 위해서 있고 그러기 위해서 한다. 말이 많은 사람이 모인 광장(아고라, 포럼)에 나가면서 서양의 논리학과 수사학은 발달했다.
글도 마찬가지다. 혼자 보는 일기나 단둘이서 보는 서간이야 아무렇게나 적어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읽는 글은 최소한 철자법이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양에선 인쇄술의 발전과 서책의 대량 보급이 그런 필요를 낳고 특히 대중신문의 보급이 정자법의 정립을 재촉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안해’(안방의 태양?) 또는 ‘안애’(안방의 아이?) 등으로 상상력을 간지럽게 하는 다양한 표기 대신 ‘아내’로 철자법을 통일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민족지가 저마다 매일 수만 부씩을 찍어 내면서이다.
말이건 글이건 대량 보급에는 반드시 소통 수단의 정비와 통일된 룰의 제정이 전제가 된다. 그 점에선 우리나라 방송언어에 문제가 많다는 우려에는 나도 동감한다. 불과 몇만 명이 읽던 신문에도 잘못된 글씨와 글을 바로잡기 위해 교정부 또는 교열부가 반드시 전담부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도 100만 명, 1000만 명대의 시청자를 상대하는 방송사에는 잘못된 방송언어를 매일매일 감시하고 교열하는 전담 ‘언어 교정부’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한국의 아고라도 공공성 지향해야
어떤 면에서는 일방통행적인 신문과 방송보다 우리나라 인터넷 언론은 쌍방향적일 뿐만 아니라 보급 비율에 있어서도 특히 젊은층에 있어선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소통언어를 위해서는 소피스트의 변론술도, 소크라테스의 변증술도 발달하지 않고 오물처럼 지저분한 언어가 음지에서 똬리를 틀고 있어 ‘변소문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테네의 아고라가 공적인 것, 공공의 세계(res publica)를 지향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 인터넷의 아고라는 끝내 익명성의 사사로운 음지에서만 배회하고 있다. 그걸 그대로 방치만 해둘 것인가. 세계를 앞서가는 한국의 인터넷 인프라와 초고속 네트워크의 보급을 자랑하면서 이건 좀 실속이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를 지향한다’고 계도할 만한 인터넷 시대의 소크라테스가 한국의 아고라에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