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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절망이라는 이름의 망상

입력 | 2009-05-16 02:54:00


철도국에 입사한 신입직원이 냉동화차 속으로 들어간 뒤 걸쇠가 풀려 문이 밖에서 잠겨 버렸습니다. 빠져나가려고 소리를 지르고 철문을 두드려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방법은 누군가가 와서 문을 열어주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오래잖아 얼어 죽게 될 거라는 불안과 공포가 그를 엄습했습니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그는 삶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상실한 채 온몸이 얼어붙기 시작했습니다. 뼛골이 저리고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걸 느끼며 그는 필사적으로 화차의 벽에다 자신의 상태를 기록해나갔습니다. 몸이 차갑게 식어간다, 움직이기 힘들어진다, 감각이 무뎌지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기록이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난 뒤 다른 직원들이 냉동화차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습니다. 벽에 적힌 기록을 발견한 직원들은 그의 죽음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냉동시설은 고장이 난 상태라 작동이 되지 않았고 공기도 충분했으며 실내온도는 섭씨 13도를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사람이 얼어 죽을 만한 환경이 아닌데도 직원은 주검이 되어버렸습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립되어 구원 받을 데가 없을 때를 이르는 말입니다. 세상과 연결된 끈이 끊어진 경우, 다시 말해 나와 세상 사이에 연결고리가 사라진 경우입니다. 깊은 산중에서 폭설을 만나 길을 잃었을 때, 배가 난파해 무인도에 당도했을 때, 비행기가 추락해 정글을 헤매고 다닐 때…. 그럴 때 인간은 절망합니다. 절망이란 희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이니 삶의 여지가 없어집니다. 그럴 때 죽음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먼저 잠식합니다. 자신이 죽는다고 절망하면 실제로 육체가 주검 상태로 돌입하기 때문입니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죽었구나, 체념하는 순간 목숨은 이미 끝장난 것과 다름없지만 살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생명은 끈질긴 지속력을 과시합니다. 그래서 절망의 순간, 희망의 가능성은 오히려 극대화됩니다. 절망이 없다면 희망도 존재의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먹고살기 힘들고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스스로 절망을 선언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절망스럽다, 절망밖에 남은 게 없다고 말하는 순간 인간의 영혼은 이미 그것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절망의 뿌리에서 아무리 많은 희망의 세포가 숨 쉬어도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고 키우지 못하니 심신은 절망의 온상이 됩니다. 철도국 직원이 절망에 잠식당하지 않고 희망의 끈을 잡고 있었다면 노래를 부르며 다른 직원이 오기를 기다렸을지 모릅니다. 절망이라는 망상, 그것에 잠식당한 영혼은 흑암의 길을 가지만 그것을 걷어낸 영혼은 무경계의 영역으로 나아갑니다.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궁무진, 언제 어디에서도 경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작가 박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