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찬 연출의 연극 ‘오셀로’는 사랑 앞에 연약한 오셀로(이남희 씨)와 강인한 데스데모나(이소영 씨)를 대조적으로 그려내 진정한 영웅의 조건을 되묻는다. 사진 제공 고양문화재단
연극 ‘오셀로’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죽음 앞에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던 오셀로는 끝내 울먹인다. 사랑하는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확신 앞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 못해 발작까지 일으킨다. 반면 그의 품에서 아기 새처럼 연약해 보이던 데스데모나는 피를 얼어붙게 만드는 남편의 저주 앞에서도 굳건하다. 심지어 남편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한다.
경기 고양시 고양아람누리 새라새 극장에서 공연 중인 ‘오셀로’(연출 심재찬)는 셰익스피어 연극의 참맛을 보여주는 연극이다. 고양문화재단과 대전문화예술의전당이 3개월여의 제작기간을 거쳐 선보인 이 연극은 원작을 비틀고 뒤집는 다른 연극과 달리 원작에 충실한 무대를 선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숙성된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연약한 오셀로 대 강인한 데스데모나’라는 색다른 이미지 창출에 성공했다.
오셀로 역의 이남희 씨는 바위처럼 차갑고 굳건해 보이던 장수가 의처증으로 한 줌의 모래로 무너져버리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연기해냈다. 의혹에 사로잡혀 흘리는 차가운 땀과 치욕에 뜨겁게 흘리는 눈물로 범벅된 그의 연기는 ‘연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라는 햄릿의 대사를 남자로 바꿔도 부족함이 없음을 보여줬다. 데스데모나 역의 이소영 씨는 냉혹한 운명의 장난에 희생되는 가냘픈 여인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데스데모나를 그려냈다.
극 중 오셀로는 “천국의 열쇠를 맡은 성 베드로의 반대편에서 지옥의 문지기나 해”라고 데스데모나를 겁박한다. 그러나 ‘사랑의 성채’를 지키는 수문장을 선택하라 한다면 관객은 주저 없이 데스데모나를 선택할 것이다. 이아고역의 김수현 씨는 타인의 감정엔 뱀처럼 차갑지만 자신의 욕망엔 용광로처럼 뜨거운 현대적 사이코패스로서 이아고를 섬뜩하게 그려냈다.
격자형 목조 창살을 겹겹이 설치한 무대는 오셀로의 사랑이 굳건한 요새에서 번뇌의 감옥으로 뒤바뀐 것을 함께 담아낸 듯하다. 그러나 안 그래도 계단식이 아니라 앞 사람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무대에 겹겹의 목조 창살을 설치한 것이 관객의 시각을 가리는 역효과를 초래한 점은 아쉽다. 24일까지. 1577-7766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