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세 정승혜 영화사‘아침’ 대표 별세
“발랄한 카피처럼 영화계 활력소였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즐거움.’
800여 편이 넘는 영화의 광고 카피를 쓴 그에게 자신에 대한 한 줄 카피를 부탁했을 때 돌아온 카피였다. 이처럼 그는 늘 영화하기의 즐거움을 지저귀던 ‘충무로의 종달새’였다. 심지어 2006년 대장암 3기 판정을 받고 나서도 자신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이를 비밀에 부치고, 뒤늦게 소식을 접한 지인들의 병문안까지 사절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17일 오전 숨을 거뒀다. 향년 44세였다.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사진)다. 어느 정도 예견했던 부고였지만 해맑은 표정으로 그를 기억하는 영화계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 지기인 이준익 감독은 “자신의 죽음도 언론에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제작 중인 영화 ‘비명’의 완성을 못 보고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할 정도로 영화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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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대표는 고졸 학력으로 1989년 2월 영화사 신씨네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영화 마케팅을 시작한 후 톡톡 튀는 영화광고 카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91년 이 감독이 대표로 있던 영화사 씨네월드로 옮겨 ‘간첩 리철진’ ‘아나키스트’ ‘달마야 놀자’ 등을 제작했다. 이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황산벌’과 ‘왕의 남자’의 공동 제작자였다. 2005년 영화사 아침을 차리고 제작자로 독립한 그는 암과 싸우면서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궁녀’ ‘님은 먼 곳에’ 등을 차례로 제작했다.
일반인에게는 그가 남긴 촌철살인의 영화 카피가 더 익숙할 것이다. ‘그들은 민중의 곰팡이’(투캅스), ‘참을 수 없는 람보의 가벼움’(못 말리는 람보), ‘모르는 척, 안 가본 척, 처음인 척’(산부인과), ‘목숨 걸고 버티기, 내공 걸고 밀어내기’(달마야 놀자) 등의 카피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20자 안팎의 짧은 문장에 영화의 정수를 녹여내는 그의 재주는 2001∼2003년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정승혜의 무비카툰’을 통해 꽃을 피웠다.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발랄한 감각을 보여준 이 인기 연재물은 2005년 ‘정승혜의 극장카툰’이란 책으로도 발간됐다.
미혼의 몸으로 ‘난 CEO(최고경영자)가 아닌 UFO(미확인비행물체)로 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영화계 곳곳에 출몰하던 그였기에 영화계의 상실감은 더 크다. 한국 영화계의 제작 여건이 크게 위축된 상황이어서일까. 명랑 유쾌했던 그의 영화 카피가 더욱 그립다.
유족으로는 어머니 윤영순 씨와 남동생 진호, 언니 진영, 여동생 승림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9일 오전 10시. 02-921-3299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