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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

입력 | 2009-05-18 13:33:00


제 20장 로보홀릭

짝사랑은 언제나 아프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로봇이든!

하얀 투피스 차림의 미미는 거의 울상이었다.

"한 달 전에도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안내문에 나와 있듯이, 저희 의 로봇들은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즉석만남을 갖기 위해 한 달에 한 차례 지난 기억을 지우고 있습니다. 최미미 님! 한 달 전 결과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세요. 저는 오늘 님을 처음 뵙는 겁니다."

"안내문을 읽긴 했지만, 정말 한 달 전을 기억 못해요?"

"그렇습니다. 오늘 님이 저를 또 제가 님을 택해도, 정확히 29일까지만 사랑을 나눌 수 있지요. 사람과 로봇이 나누는 사랑의 유효기간은 최대 29일이라는 보고가 2년 전 홍콩로봇대학에서 발표된 적도 있습니다."

"아니에요. 부엉이를 향한 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아요. 29일이라고요? 웃기네. 희한한 상술이야. 오늘까지 꼬박 30일을 당신 생각만 했다고요."

"일방적인 사랑이야 평생 가능합니다. 하지만 님이 저를 또 제가 님을 택한 후론 29일 뿐입니다. 안타까워 마십시오. 시한부 사랑이 더욱 애절하고 깊은 법입니다."

미미가 부엉이의 강철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 쇳덩어리 손등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급히 손을 빼내려던 부엉이는 자신의 손등으로 떨어지는 액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인간 여자가 운다, 우는 여자는 위로해줘야 한다, 그 여자가 왜 우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대체 왜 우는 걸까.

이런 생각이라도 하는 표정이다.

"10분이 지났습니다. 손님께서는 지정된 방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즉석만남은 5분 후에 바로 시작될 예정입니다. 처음 나눠드린 스케줄에 따라 방 번호를 확인하시고 입장해 주십시오."

안내방송이 나오자, 부엉이는 손을 급히 거둬들인 후 일어섰다. 그리고 공손히 인사했다.

"최미미 님! 즐거웠습니다. 아무쪼록 남은 즉석만남도 행복하시기 빕니다."

미미도 눈물을 훔치며 따라 일어섰다.

"잊지 말아요. 내 이름은 가장 아름답고 아름다운 최미미! 꼭 날 불러줘요. 부엉이, 당신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제발, 제발!"

부엉이가 웃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미미가 방을 나갈 때까지 로봇은 결코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잠깐만!"

갑자기 부엉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라는 건, 나를 택하겠다는 뜻!

미미는 앞니가 드러날 만큼 환하게 웃으며 뒤돌아섰다. 그 순간 부엉이가 이야기를 이었다.

"아직 앞 손님이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잠깐만 밖에서 기다려 주시면……."

그녀와 부엉이 사이에 어느새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부엉이는 미미가 아니라 갑자기 찾아든 그를 다음 즉석만남 상대로 파악하고 안내를 한 것이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불청객의 주먹이 급소를 찔렀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손님! 괜찮으십니까?"

"손님! 괜……."

손님에게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로봇은 우선 세 차례 상태를 확인하는 질문을 던지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부엉이가 충실히 세 번 물음을 끝마치기 전에 또 다른 낯선 사내가 부엉이의 뒷목에 붙은 전원을 쉽게 찾아서 껐다. 부엉이는 말을 맺지 못하고 쓰러졌다.

미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달리는 자동차 안이었다.

손발을 묶지도, 재갈을 물리지도 않았다.

"누, 누구야?"

그녀가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유리창에 붙은 낯익은 세 발 달린 까마귀 마크가 눈에 띄었다. 삼족오(三足烏)는 보안청의 심볼이다.

"극비 임무를 수행중입니다. 미미 씨 도움이 필요하여 잠시 모셨습니다. 협조에 따른 보상은 특별시 차원에서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곁에 앉은 앨리스가 또박또박 경과를 설명했다. 맞은편의 석범도 선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부엉이는?"

미미가 눈물을 글썽이며 우물우물 물었다. 부엉이와의 데이트가 못내 아쉬운 것이다.

"예? 누구라고요?"

앨리스가 반 귀머거리 흉내를 내듯 귀를 바싹 그녀에게 돌리며 물었다.

"즉석만남을 가졌던, 그 로봇, 멋지게 생긴, 언제나 친절한……."

석범이 미미의 속마음을 읽었다.

"아, 부엉이! 그 로봇과는 특별히 29일 내내 만나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정말이세요? 감사해요."

두려움에 가득 찬 미미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헌데 제가 도와드릴 일이 뭐죠? 전 평범한 간호사일 뿐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