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통령이 각 부처의 업무보고를 받는 일이 일상화되자 각 부처 공무원들은 브리핑 준비에 많은 공을 들였다. 수출확대회의에서 보고를 받고 있는 박 대통령(가운데). 동아일보 자료 사진
개발시대의 엘리트들
브리핑 활성화로 업무 핵심 보고
해외연수 통해 국제사회 견문 넓혀
엘리트들의 헌신 경제개발 이끌어
지금 와서 회고해 보면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나의 휘하에는 언제나 유능한 인재가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기록을 보면 재무부, 경제기획원에서 나와 함께 일하던 공무원 중 경제부총리 혹은 재무부 장관으로 등용된 사람이 올해 3월까지 17명이다. 이는 양 부처 역대 장관 총수인 32명의 53%에 해당한다. 이 밖에 총리로 임명된 사람도 있고 정계에 진출해 활약하고 있는 후배도 적지 않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에는 개발시대의 엘리트가 모여 있었다. 그들의 탁월한 능력과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당시 나의 경제정책 형성과 집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공무원들의 자기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브리핑제도와 해외연수였다고 생각된다. 한국의 브리핑 기법은 우리 군이 미군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복잡한 문제를 알기 쉽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들어와서 대통령이 각 부처의 업무보고를 받는 일이 일상화되자 각 부처는 브리핑 차트를 만드는 데 공을 들였고 장관은 브리핑을 잘하는 상급 공무원을 찾아야 했다. 브리핑을 담당하는 공무원 또한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을 잘하면 승진 기회가 열릴 것을 기대해 열심히 연습했다. 경제부처에서는 경제기획원의 서석준 강경식 씨, 상공부의 심의환 박필수 씨, 건설부의 정재석 씨가 브리핑 잘하기로 유명했고 사실상 그들은 출세의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공무원들의 능력을 계발하는 데에는 해외연수가 큰 역할을 했다. 개발시대의 엘리트 중 미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거나 해외연수를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공무원의 해외연수는 전적으로 미국의 대외원조 계획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원조가 종식을 고하게 되자 나의 참모들은 앞으로 공무원들의 해외연수가 어렵게 됐다고 보고해 왔다. 나는 종래의 규모대로 해외연수를 보내려면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지 추정해 보라고 했고 추정 결과 약 3억 원이면 된다고 보고하기에 연수 계획을 짜라고 지시했다.
내가 해외연수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데에는 숨겨진 이유가 하나 있다. 당시 판사나 검사들은 대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등용문을 바라보고 열심히 법률 공부를 해서 고시에 합격한 준재(俊才)들이다. 사법부에는 외국에서 학위를 받거나 공부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특이한 현상이었다. 그래서인지 경제사건을 다루는 것을 보면 경제와 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국제감각이 없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이 선진국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 돌아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성안된 연수계획은 행정부, 사법부 각 부처의 신청을 받아 골고루 보내기로 했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서일교 법원행정처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 계획을 알리고 신청하라고 했더니 그게 정말이냐며 기뻐했다. 사법부에는 ‘외유’의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각 부처에 배당한 자리가 약간 남자 경제기획원 지망자로 채웠다.
연수계획에 따라 미국에 유학했던 공무원 중 한덕수 씨(후일 국무총리)는 하버드대에서, 이석채 씨(후일 정보통신부 장관)는 보스턴대에서, 조정재 씨(후일 해양수산부 장관)는 캔자스주립대에서 각각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고 김영주 씨(후일 산업자원부 장관)는 시카고대에서 명성 높은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그들이 학위 취득을 위해 연수기간 연장을 신청했을 때 해외연수를 가지 않은 사람과의 형평을 고려해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나는 허가하기로 했다. 인재를 키우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