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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현 교수의 디자인 읽기]기획 초기부터 디자이너 참여

입력 | 2009-05-23 02:59:00


개발-생산-마케팅 주체로 활용

업계에서는 날이 갈수록 디자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디자인이 강한 기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이야 여럿 있겠지만 필자에게 딱 하나만 꼽으라면 제품기획의 초기단계부터 디자인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히 디자이너를 기계적으로 기획단계에서부터 참여시키라는 말이 아니다. 신상품 개발에 관련된 모든 이들이 기획 초기부터 디자인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스타급 디자이너를 스카우트해 일회성 히트 상품을 내놓을 수 있지만 효과가 오래 지속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디자이너와 회사의 궁합이 맞지 않으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디자인팀을 강화하는 것은 어떨까? 인원을 늘리려면 그 인원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재능 있는 디자이너를 채용하는 것도 말은 쉽지만 필요한 재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측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재능 있는 디자이너를 뽑았다 해도 갈 길은 멀다. 호나우두도 패스해주는 선수가 없으면 골을 넣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디자인팀이 제대로 작동할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이 시스템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처음부터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마케팅 등이 하나로 통합되어 제품이 기획되고 개발되는 것을 말한다. 디자인이 강한 기업의 공통점이 바로 이것이다. 제품기획의 후반부에 디자이너가 참여하게 되면 이미 많은 디자인 제약조건이 생겨 디자이너는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창의력은 떨어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초기부터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최근 세계 디자인계에서는 창발적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창발(emergent)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이 시스템은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독창적 디자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자들의 다양한 심리·문화적 욕구, 현재의 기술 수준, 경제성, 개발시간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하는 업무 흐름이자 일종의 사고법이라고 보면 된다. 디자이너가 개발 생산 판매 등 상품의 모든 측면을 고려해야 하니 제품 기획 단계에서부터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디자이너로서는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해야 해 부담이 크지만 디자인에 대한 여러 제약 조건이 결정되기 전이라 창의적인 디자인 개발의 기회는 매우 넓어진다.

현장에서는 이미 많은 창발시스템이 개발돼 있다. 칼 포퍼와 같은 철학자의 이론을 원용한 추측-반증모델이 있는가 하면 분석-통합모델, 추측-평가모델, 패러다임 이동모델, 다공간(多空間) 모델 등이 개발돼 이미 세계적 기업에서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가치공간, 의미공간, 상태공간, 속성공간의 4개 공간에 걸쳐 디자인 문제를 도출해 최적화된 디자인 솔루션을 찾는 다공간모델은 일본 게이오대의 마쓰오카 요시유키(松岡由幸) 교수가 개발한 것으로 현재 도시바나 마쓰다와 같은 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제품의 기본적인 조건에서 시작되는 창발시스템은 디자이너를 신상품 개발의 능동적 주체로 끌어올린다. 이 시스템이 가동되면 또 다른 수확도 있다. 제품개발에 참여하는 다양한 전문가들은 디자인에 익숙해지게 된다는 점이다. 함께 제품을 기획하며 자연스럽게 디자이너들이 일하고 생각하는 방식을 습득하기 때문이다. 기업으로서는 엔지니어링 중심적인 디자이너, 마케팅 중심적인 디자이너 등 다양한 성격의 준(準)디자이너를 보유하는 셈이다. 디자이너는 역으로 디자인 중심적인 마케터, 엔지니어가 될 것이다. 더불어 대부분의 기업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디자이너와 타부서 간의 커뮤니케이션도 원활해질 것이다.

다이손이라는 세계적 사이클론 청소기회사에 디자이너가 없는 이유는 모든 엔지니어에게 디자인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한 적이 있다. 그 디자인 교육의 실체도 아마 이런 디자인 방법론, 다시 말해 사고법을 익히는 것일 게다.

창발시스템을 도입해 제품기획의 초기부터 디자인을 고려하게 되면 이처럼 기업은 디자인이 강한 체질로 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설령 외부 디자이너에게 일부 스타일링 업무를 의뢰하더라도 자사 디자인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견고한 디자인 인프라를 갖추게 될 것이다. 특히 매번 외부 디자인회사에 용역을 의뢰할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에서도 제품 간 통일성과 독창성, 나아가 시장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지상현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