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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찬란한 中 문화유산, 도굴꾼에게 짓밟히다

입력 | 2009-05-23 02:59:00


“금은보화 가득한 황제들의 무덤을 털어라”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웨난 외 지음·정광훈 옮김/392쪽·1만4000원·돌베개

황족들 勢과시 위해 무덤에도 화려한 부장품 넣어
1800년전에도 도굴… 문화유산 보존 소중함 일깨워

1800여 년 전에도 도굴이 있었다.

기원전 202년 중국 후난(湖南) 성 창사(長沙) 시에 중국 한나라의 제후국인 장사국의 왕 오예가 묻힌 지 400여 년 만인 226년경 일이었다. 오나라 사람들이 손견(손권의 아버지)의 사당을 지으며 부족한 목재를 오예 무덤을 도굴해 구한 것이다.

당시 귀족의 무덤은 흙구덩이를 파서 구덩이 바닥에 고급 목재로 관이 들어갈 공간을 만든 다음 목관을 집어넣는 방식이어서 목재가 풍부했다. 정사와 야사를 비롯한 각종 문헌에서는 도굴꾼들이 관 뚜껑을 열자 비단옷으로 감싼 오예가 얼굴색이 생생하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가지런한 채 은은히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었다고 기록했다. 도굴꾼들은 산 사람과 다름없는 오예를 보고 귀신이 왔다며 혼비백산했다.

도굴 이야기에 흔히 등장하는 허풍일까. 중국의 고고학 저술가인 저자들은 그렇게만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비슷한 지역에서 1700년 뒤인 1971년 발견된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이 묘의 주인이 오예와 알고 지낸 여성이라는 점. 신추(辛追)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오예를 감시하기 위해 장사국에 파견한 승상 이창(利蒼)의 부인이었다.

2000여 년 전 묻힌 신추의 시신은 얼굴이 생생해 피부조직이 살아 있는 듯했고 발가락의 지문까지 남아 있었다. 도굴 이야기에 살아 있는 시체 이야기가 감초처럼 등장하는 건 고대의 선진적 방부기술 때문인 셈이다. 천하를 호령한 중국 황족들은 죽은 뒤에도 화려한 부장품을 넣은 무덤을 만들었다.

살아 있을 때 궁에서 생활한 것처럼 꾸몄다고 해서 관이 있는 곳을 지하궁이라 부른다. 금은보화 가득한 지하궁은 도굴꾼의 표적이 됐다. 고고학 저술가인 세 명의 저자는 중국의 도굴사를 추적한다.

중국은 전 역사에서 도굴이 성행했다. 마왕퇴한묘는 1971년 정식 발굴됐으나 신추의 남편 이창과 아들의 시체는 모두 썩어버렸다. 오래전 이미 도굴됐기 때문이다. 발굴팀은 도굴꾼이 판 동굴 두 개를 발견했다. 굴에서는 묘의 시대보다 훨씬 후대인 당나라의 자기 그릇이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당나라 이후에는 이 그릇도 값어치 나가는 유물이 됐을 것이기 때문에 당나라 때 도굴된 것으로 봤다.

섭정으로 권세를 누린 청나라 서태후(자희태후)는 1909년 화려한 보석들과 함께 묻혔지만 근대기 도굴의 희생양이 됐다. 장제스(蔣介石)가 총사령관이었던 국민혁명군의 6군단 12군의 사령관 쑨뎬잉(孫殿英)이 도굴의 장본인이었다. 군량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던 그는 도적떼가 서태후 등 청의 황족이 묻힌 동릉을 도굴해 금은보화를 훔쳐 내다판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도굴에 나선다.

중국 황족의 무덤은 도굴을 걱정해 지하궁의 위치를 극비에 부쳤다. 쑨뎬잉은 서태후의 장례를 맡아 지하궁에 이르는 길을 잘 아는 노인을 수소문해 기어코 지하궁을 찾아낸다. 지하궁 입구를 막은 석판과 지하궁의 석문을 안쪽에서 지탱하는 돌기둥을 폭약으로 폭파해버렸다. 지하궁에서 외곽과 내곽으로 된 2중 구조의 관을 도끼로 찍어 열자 보석들 사이에 누워 있는 서태후의 시신이 드러났다. 시신 입에 물려 있는 야명주(어두운 데서 빛을 내는 구슬)를 꺼내려다 야명주가 시체의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목구멍을 찢고 꺼낼 정도로 도굴 현장은 끔찍했다.

원한을 이유로 도굴한 경우도 있었다.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06년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수도를 점령한 오나라의 장수 오자서(伍子胥)는 초나라의 평왕이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죽였다는 이유로 군대를 앞세워 관 뚜껑을 연 뒤 채찍으로 시체를 때리고 훼손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등재 전망이 밝은 조선왕릉 40기는 거의 도굴되지 않았다. 도굴을 막기 위한 방어장치가 훌륭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중국 황릉들과 달리 부장품을 거의 넣지 않은 검소함 때문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