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PECC) 상임이사회 멤버로서 아시아태평양 국가 간 협력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했다. 2005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PECC 총회. 동아일보 자료 사진
지역적 협력방안의 모색
하와이서 亞太경제협의체 연구
한국대표로 PECC 창설 힘보태
1989년 APEC 출범의 모태 역할
1980년 5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로 가게 됐다. 거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경제특보 때 제기했던 문제를 연구하려고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나는 1979년 8월 22일, 경제특보로서 ‘태평양무역개발기구(OPTAD) 창설을 위한 각국 동향과 대응책’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한 일이 있다. OPTAD는 미국 예일대의 휴 패트릭 교수와 호주국립대의 피터 드라이스데일 교수가 미국 의회의 위촉을 받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협의체 창설을 구상한 보고서다. 미국, 일본,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관계자들과 장기간에 걸쳐 협의한 끝에 작성된 이 보고서는 7월에 하원청문회와 동시에 공표됐다. 그에 앞서 5월 동서문화센터 원장이 청와대로 나를 찾아와 한국의 협력을 요청한 바도 있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고서에서 경제적으로는 가급적 개방적인 무역 질서의 유지, 동남아 지역과의 교역 확대, 자원 확보라는 견지에서 지역협력체에 가입하는 것이 유리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국내정책 운용에 제한을 받는 측면도 있으므로 국제경제연구원으로 하여금 우리의 이해관계와 대응책을 면밀하게 조사 연구하도록 하고 국제적 추이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건의에 동의하고 필요하다면 예산도 지원하겠다는 메모를 보고서 표지에 써서 내려 보냈다.
나는 동서문화센터에서 이 문제를 연구하고 아시아태평양 국가 간의 지역협력 가능성을 가늠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OPTAD는 각국 정부 간의 이견 차로 정부 간 협의체로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대신 1982년에 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PECC)라는 민간단체가 출현하게 돼 필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상임이사회 멤버로서 이 단체의 창설과 발전에 많은 노력을 했다. 동료 멤버에는 일본의 오키타 사부로(大來佐武郞), 태국의 타낫 코만, 호주의 존 크로퍼드 경, 캐나다의 에릭 트리그, 뉴질랜드의 브라이언 털보이스가 있었다. 우리는 회원국을 돌아다니며 지역협력 분야와 방법을 논의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 간 협의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나는 1993년 김기환 박사에게 PECC 한국대표 직책을 넘겨주었고, 지금은 양수길 박사가 한국대표로 선출돼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한편 PECC가 정부 간 협의체의 구성을 촉구한 보람이 있어 1989년 11월 PECC 회원국에 아세안 국가를 추가한 12개국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APEC)를 결성하게 됐고, 첫 회의가 호주의 캔버라에서 개최됐다. 이로써 APEC는 태평양 국가 간의 경제협력기구로 출발했는데 태평양이라는 애매하고 포괄적 개념 때문에 그 후 중국, 러시아, 대만뿐만 아니라 멕시코, 페루 등 태평양 연안국 및 도서 국가들이 참가하게 되어 회원이 21개국으로 늘어났다. 회원수가 늘다 보니 통일된 업무 추진과 의사결정이 어렵게 돼 지금의 APEC는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PECC와 APEC를 통해 ‘지역협력’이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는데 그것은 세계화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로 가기 위한 가교(架橋)라는 해명을 필요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