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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딸과 진보성

입력 | 2009-05-26 02:56:00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의 아버지 휴 로댐은 죽을 때까지 골수 공화당 지지자였다. 그는 농담이긴 했지만 “힐러리를 웰즐리대에 보낸 것은 큰 계산 착오”라고 말하고 다녔다. 집안의 기대주인 맏딸이 그가 혐오하는 히피처럼 보고 듣고 입고, 그가 증오하는 진보성향의 뉴욕타임스를 읽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도 사위 빌 클린턴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나도 공화당원이라오. 하지만 저 친구(빌 클린턴)는 정말 괜찮다오”라며 선거운동에 나섰다.

▷딸부자 아버지일수록 진보성향을 띤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자국의 가구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딸이 많은 아버지들은 진보성향인 노동당 지지율이 높았다고 24일 보도했다. 아들 셋만 둔 부모의 67%가 노동당에 투표한 반면 딸 셋 있는 가구의 노동당 지지율은 77%였다. 딸 둘이나 딸 넷을 둔 가정도 비슷한 투표경향을 보였다. 유사한 분석 사례가 없는 한국은 어떨는지 모르겠다.

▷영국 워릭대 앤드루 오즈월드 교수는 “딸의 존재는 아버지들의 정치적 견해를 변화시키며 ‘여성적 욕구’를 훨씬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고 말했다. 출산과 육아 부담을 지는 여성들은 정부에 증세(增稅)와 공적 역할 증대, 여성 부담 경감을 요구하고 이런 딸을 둔 아버지는 동조현상을 보이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딸이 고생하는 꼴은 못 보겠다는 부성애 같기도 하다. 반면 아들을 둔 어머니는 공공 역할 축소와 감세(減稅)를 선호하는 ‘남성적 경향’에 근접하기 쉽다. 정치적 성향이나 지지하는 정당도 부정과 모정 앞에선 종속변수일 뿐인가.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미국 하원의원들의 법안에 대한 견해가 달라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자식이 있을수록 진보적이며 딸이 있으면 더 그렇다고 한다. 아내 때문에 정치적 견해나 지지정당을 바꾸었다는 얘기는 별로 없다. 왜 하필 딸일까? 아마도 아내와 딸에 대해 남자들이 이중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맥주가 아내에겐 술이지만 딸에겐 음료가 된다. 아내가 ‘꽃보다 남자’를 볼 때는 한심하게 여기지만 딸이 볼 때는 슬며시 끼어들어 아는 체를 하는 게 남자들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