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속구 없이 최고가 된 소방수
24일 현재 시즌 성적은 12경기에 등판해서 정확히 12이닝을 소화하면서 피안타 5개, 볼넷 허용 0개, 탈삼진 11개, 실점 역시 단 1점도 없다. 야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팬이라면 이 선수가 불펜투수, 그 중에서도 마무리투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이 선수는 11번의 세이브 기회에서 모두 성공하며 확실한 뒷문 단속을 하고 있다. 역시 마무리 투수라면 시속 150km를 쉽게 넘기는 불같은 강속구에 상대 타자를 타석에서 순간적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확실한 변화구 무기를 하나쯤은 갖춘 선수를 머릿속에 그리게 된다. 그런데 이 주인공은 올 시즌 직구 최고구속이 142km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메이저리그 명품으로 꼽히는 체인지업이 장착돼 있다. 이 주인공은 밀워키 브루어스의 마무리투수 트레버 호프먼이다. 야구에서 느림의 미학을 확실히 보여주는 ‘이방인’ 마무리 투수를 살펴보자.
메이저리그 18년 경력의 호프먼은 메이저리그 역대 개인통산 세이브(565) 부문 1위 선수다. 올해 만 41세로 야구선수로는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다. 1989년 신시내티가 11라운드 지명으로 투수가 아닌 내야수로 드래프트했던 선수다. 투수로 전향한 그는 1993년 플로리다에서 빅리그에 데뷔했고, 그해 바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가 됐다. 그리고 지난해까지 샌디에이고의 수호신으로 이미지를 각인했다.
물론 처음부터 느린공을 던진 투수는 아니었다. 시속 150km 중반대의 빠른공과 타자의 타이밍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체인지업으로 타자를 무력화했던 투수였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구속이 급감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03시즌에 팔꿈치 인대 이식 수술을 하면서 30대 중반의 나이로 재기가 어렵다는 전망도 있었지만, 그 이듬해 41세이브로 가볍게 부정적인 시각을 일축했다. 부상전에야 그 때문에 구속이 떨어진 것으로 봤지만 수술 후에도 구속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타자와의 타이밍 싸움에 이미 달인이 된 호프먼은 04시즌부터 4년 연속 40+세이브에 2점대 방어율을 유지하며 리그 엘리트 마무리로 위치를 지켜 나갔다. 지난해 30세이브 3.77의 방어율을 기록한 뒤 구단주가 바뀌는 상황에서 샌디에이고를 섭섭하게 떠나게 된 그는 최근 수년간 마무리 투수난에 시달리던 밀워키로 갔지만 아직도 엘리트 마무리로서 마운드에 우뚝 서 있다.
자신의 경력 절반 정도를 90마일에 미치지 못하는 구속으로, 그것도 사이드암이나 언더핸드와 같은 유형이 아닌 정통파 스타일로 꾸준히 마무리투수 자리를 지키는 사례는 정말 드물다. 실제로 통산 세이브 상위 10걸을 살펴보면 전성기 당시 최소한 시속 150km 이상의 빠른공을 던진 투수가 대다수다.
10위에 올라있는 롤리 핑거스는 사이드암 투수로 선수 후반기에는 완전히 언더핸드 투수로 돌아섰다. 그나마 호프먼과 가까운 유형을 꼽으라면 개인통산 424세이브로 좌투수 최다 세이브의 주인공인 존 프랑코를 들 수 있다. 그러나 프랑코는 좌투수라는 이점과 마지막 5년간 성적은 기대에 많이 미치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현재 호프먼의 호투가 더욱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상위 20위까지 범위를 넓혀보면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제프 몽고메리가 호프먼과 비슷한 유형의 마무리투수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빠른 볼로 알려진 투수가 아니었지만 마무리로는 드물게 한두 개의 구종에 의존하는 투수가 아닌 직구,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고루 구사하며 타자를 상대하는 특징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구위가 떨어져 결국 13시즌 만에 갑자기 사라지게 된다.
20위에 올라있는 덕 존스는 언더핸드 투수로 ‘느리게, 더욱 느리게, 아주 느리게’ 혹은 ‘슬로우 패스트 볼’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느린공을 주무기로 한 마무리투수였다. 그렇지만 역시 언더핸드 투수로 메이저리그 기준에서는 특이 유형의 투수였다.
결국 우완 정통파 투수로 빠른 공을 잃은 후 평균 140km를 겨우 넘는 구속으로 10년 가까이 정상급 마무리로 활약하는 선수는 역사적으로도 호프먼이 거의 유일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빠른공을 주무기로 한 대다수 마무리투수들은 선수 생활 말년에 구위가 떨어지면서 성적이 급전직하하는 것이 오히려 더 보편적이다. 구위에 의존하던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타자 상대에 자신감을 잃고 쓸쓸히 사라지게 된다.
이런 면에서 호프먼의 존재 가치는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투수 분업화로 세이브 기록이 과거에 비해 확연히 늘어났지만 호프먼처럼 꾸준히 쌓기는 쉽지 않다. 그가 앞으로 더 쌓아 올릴 기록에 박수를 보낸다.
송재우 | 메이저리그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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